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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무너진 유적과 내면의 폐허를 찾아 나선 여행기

등록 2014-11-20 20:54

제프 다이어의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는 무너진 유적지에서 마음의 폐허를 더듬는 여행기다. 사진은 이탈리아 로마의 유적지 포로 로마노. 사진 최재봉 선임기자
제프 다이어의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는 무너진 유적지에서 마음의 폐허를 더듬는 여행기다. 사진은 이탈리아 로마의 유적지 포로 로마노. 사진 최재봉 선임기자
제프 다이어 에세이 ‘…요가’ 출간
로마, 앙코르와트, 아르데코 등 대상
네바다 사막 버닝맨에선 ‘구원’ 체험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

제프 다이어 지음, 김현우 옮김
웅진지식하우스·1만3800원

영국 작가 제프 다이어는 사진 에세이 <그러나 아름다운>과 재즈 에세이 <지속의 순간들>이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되었지만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 반응이 그다지 뜨겁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이 두 에세이를 번역한 이가 소설가 한유주이며 <지속의 순간들>을 일본어로 옮긴 이는 다름 아닌 무라카미 하루키라면 생각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게다가 알랭 드 보통이 어느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며 추천하고 싶은 에세이로 역시 다이어의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를 꼽았다니, 이 작가야말로 ‘작가들의 작가’가 아니겠는가.

바로 그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가 다이어의 책으로는 세 번째로 한국어판을 얻었다. 다이어는 논픽션과 르포, 소설 등 다양한 산문 장르를 섭렵하는 작가지만 주 종목은 역시 에세이인 모양. 로마, 렙티스 마그나(리비아), 뉴올리언스, 코팡안(타이), 암스테르담, 발리, 캄보디아, 파리, 아르데코(미국 마이애미), 디트로이트, 블랙록 사막(미국 네바다). <…요가>는 이 열한 곳을 대상으로 삼은 일종의 여행 에세이라 하겠는데, 얼핏 계통이 없어 보이는 이 장소들을 관통하는 열쇳말이 ‘폐허’다.

“어쩌면 고대 유적에서 배우는 가장 간단한 교훈은, 뭐든 수직으로 세운 것은 (…) 훗날 경외의 대상이 된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수평적인 것들이 주는 매혹에 저항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 언젠가는 남은 유적들이 모두 사라져 사막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수평선을 방해하는 수직 기둥들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것이 시간에 대한 공간의 최후의 승리일 것이다.”

“젊은 시절의 지적인 훈련과 야망들이, 심드렁했던 약물남용과 나태함 그리고 실망감 때문에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는 것, 나에게는 목적도 방향도 없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삼십 대 때보다 훨씬 적게 생각한다는 것, 나 스스로 빠른 속도로 폐허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대해 아무렇지 않아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각각 ‘렙티스 마그나’와 ‘로마’ 편에서 인용한 두 대목은 다이어를 여행으로 이끈 것이 바깥의 폐허일 뿐만 아니라 그의 내면의 폐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이 책에 나오는 여행을 할 당시 다이어는 사십대 초반의 나이. 젊음의 특권과도 같은 열정과 모험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하며, 그토록 탐닉했던 마리화나와 같은 약물의 세계에서도 어느덧 ‘은퇴’를 생각해야 하는 무렵이었다. 리비아의 로마 유적 렙티스 마그나를 보기 위한 여행 중 호텔 방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내 인생에서 있었던 모든 비극들이 갑자기 얼굴 위에 그대로 모습을 드러낸 것만 같았다”는 끔찍한 생각에 사로잡힐 때, 또는 전자음악 축제 취재차 갔던 디트로이트의 레스토랑에서 혼자 음식 접시를 앞에 놓고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릴 때 그는 제 안에 무시무시한 폐허가 자리잡았음을 알게 된다. 역시 디트로이트의 미시건 중앙역 폐건물을 가리켜 그가 낯선 이들에게 하는 연설은 음울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을 담고 있다.

“폐허는 과거를 떠올리게 하지 않습니다. 그건 보는 이를 미래로 안내하죠. 거의 어떤 예언 같은 느낌입니다. 미래는 결국 이런 모습이 될 거라는 예언이요. 미래는 늘 이런 모습으로 끝났습니다.”

폐허를 더듬는 여행 에세이 <…요가>의 정조는 당연히 늦가을처럼 쓸쓸하고 막막하다. 그럼에도 구원의 계기가 없지는 않으니, 네바다주 블랙록 사막에서 해마다 열리는 버닝맨 축제에 참가했을 때가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책의 마지막에 배치된 이 여행에서 그는 지난 여행들을 총괄하면서 제 안팎의 폐허와 화해를 꾀한다.

“그리고 여기 지금, 나는 버닝맨이 서 있던 자리에 남은 타다 만 장작을 바라보고 있다. 내 인생의 정점이었지만, 한편 익숙하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이 있어 그동안의 삶 전체를 긍정할 수 있게 되는, 그런 순간. 다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기꺼이 그때까지의 삶을 한번 더 살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조락과 침잠의 계절인 늦가을 이 무렵쯤 찬찬히 읽어 보면 좋을 듯한 책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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