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니. 사진 문학과지성사 제공
우리를 모르고
이제니 지음/문학과지성사·8000원 “멀어지는 사이 다시 떠오르는 말/ 달아나는 사이 다시 사라지는 달”(<달과 돌> 부분) “그을음 위로 그 울음이 번질 때// 그 울음 위로 그 울림이 겹칠 때”(<그을음 위로 그 울음이> 부분) 이제니(사진)의 시를 읽을 때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표기와 발음의 유사성에 착안한 말장난이다. 첫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2010)에서부터 반복을 활용한 리듬감 조성에 재능을 보였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말의 물성(物性)을 중시하는 독특한 시들을 선보인다. 의미를 중시하는 독자들에게는 이제니의 시가 요령부득의 난해한 독백처럼 다가올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시집 해설을 쓴 평론가 조재룡 교수(고려대 불문과)에 따르면 사정은 거의 정반대여서, 이제니는 언어에 단 하나의 확정된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에 맞서 말과 시를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 쪽으로 한껏 열어 놓으려 하는 첨단의 시인이다. 그가 이제니를 가리켜 “시의 최전선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는 리듬의 화신”이라 칭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다. 말하자면 프로이트가 주목한 말실수 또는 데리다 같은 해체주의자들이 적극 끌어안은 말장난처럼 인간 주체의 의도와 폭력에서 자유로운 ‘해방된 말’이 이제니의 시가 꿈꾸는 말이라 하겠다. “사랑을 위한 사랑은 하지 않기로 시를 위한 시는 쓰지 않기로”(<구름 없는 구름 속으로> 부분) “들려온다. 하나의 음이. 하나의 목소리가. 태초 이전부터 흘러왔던 어떤 소리들이. 이름을 붙여주기 전에는 침묵으로 존재했던 어떤 형상들이.”(<나선의 감각-음> 부분) 인용한 작품들을 참조하자면 이제니의 시는 “시를 위한 시”가 아니며 “이름을 붙여주기 전에는 침묵으로 존재했던 어떤 형상들”을 드러내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시에서 그가 “나는 나로 살기 위해 이제 그만 죽기로 하였다”(<마지막은 왼손으로>)고 적을 때에도 그는 “시를 위한 시는 쓰지 않기로” 한 결심을 강렬하고도 단호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기왕에 고정된 의미를 거부하고, 인간에게 포착되기 전에 원초적으로 존재했던 무정형의 형상 또는 인간은 물론 말 스스로도 아직 짐작하지 못한 ‘도래할 의미’를 추구하는 이제니의 시들은 모호하지만 아름다운 울림과 이미지로 독자를 매혹시킨다. “이것은 누구의 목소리입니까. 사라진 줄 알았던 목소리가. 녹색을 띤 그늘 속 이끼처럼. 둘로 나뉜 하나의 물방울처럼. 밤과 낮의 경계 너머로 되살아나. 낱말을 발명하는 사람의 입술 주름 위로. 천천히. 손가락 하나를 가져가듯이. 어떤 간격. 어떤 틈. 접힌. 닫힌. 시간 혹은 장소의. 영원과도 같은 한순간을. 펼쳐보려는. 열어보려는.”(<그곳에서 그곳으로> 부분)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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