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환 시인.
“폴란드는 우리와 비슷하게 식민과 핍박의 역사를 지녔습니다. 그 나라를 대표하는 현대 시인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의 시전집을 번역하는 동안 서글픈 마음을 금하기 어려웠습니다. 왜 우리에게는 이런 시인이 없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죠. 헤르베르트는 말하자면 우리의 서정주·김수영·김남주가 하나로 뭉쳐 있는 시인입니다.”
시인 김정환 씨가 폴란드 시인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1924~98)의 시전집을 번역 출간했다. 세계 여러 나라 시인 12명의 전집을 혼자서 번역하는 ‘문학동네 세계 시인 전집’의 세번째 권으로, 2011년의 <셰이머스 히니 시전집>과 지난해 초의 <필립 라킨 시전집>에 이어지는 작업이다.
헤르베르트는 르부프(지금은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2차 대전 때 레지스탕스로도 활동했으나 해방 뒤 사회주의 리얼리즘 시대를 지나 스탈린 사후인 1956년에야 문단에 나왔다. 68년 영미권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죽기 전까지 시집과 희곡, 에세이 등 20여권을 펴냈다. 김 시인은 이번 시전집 해설에서 “어휘와 시 문법이 유난스럽지 않은 채로 파란만장의 현대에 이른,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 헤르베르트를 평했다.
“제가 헤르베르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시인 체스와프 미워시가 펴낸 영역 <폴란드 민족시집>(실천문학사)을 82년에 한국어로 번역해 펴내면서였습니다. 그 시집에서 헤르베르트의 시 ‘비’가 가장 인상 깊었고, 한편으로는 영어 중역이라 늘 꺼림칙했던 차에 30여년이 지나서 결국 폴란드어에 기반한 번역본을 내놓게 된 것이죠.”
2일 낮 서울 시내 한 식당에서 기자들과 만난 김 시인은 매료됐던 시 ‘비’도 소개했다. “내 형이/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이마에 은 별표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별표 밑은/ 벼랑이었다//(…)// 가을이면 그가 돌아온다/ 호리호리하고 무척이나 조용하다/ 집에 들어오려 하지 않는다/ 그가 창을 두드리고 내가 나간다// 우리는 함께 걷는다 거리를/ 그리고 그가 내게 들려준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내 얼굴을 만지며/ 눈먼 손가락, 울음의 그것으로 말이지”(‘비’ 앞부분과 뒷부분)
“헤르베르트는 식민과 억압의 체험을 더 높은 차원의 명석한 슬픔에 도달함으로써 시적으로 극복한 시인입니다. 견고한 서정이 너그러움과 포용으로 승화해서 그것이 오히려 문학적 복수가 되는 광경을 시로써 보여줍니다. 전통적 어법을 유지하면서도 현실의 슬픔을 더 높은 현대성으로 끌어올리는, 세계 모더니즘 시의 드문 사례라 할 수 있죠.”
김 시인은 “영역본을 저본으로 삼되 폴란드어를 따로 공부해서 단어 차원에서부터 샅샅이 그리고 낱낱이 검토함으로써 원문의 맛을 살리려 했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 시인 전집’의 번역을 위해 전공인 영어뿐만 아니라 러시아어·스페인어·독일어·그리스어 등 “필요한 말을 다 공부했다”고 밝혔다.
글·사진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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