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모든 빛깔들의 밤>을 낸 작가 김인숙. 문학동네 카페에 연재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썼다. “혹시 상심하는 날이 있으면, 혹시 뜻밖에 상처받는 일이 있으면, 이렇게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무서워도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고.” <한겨레> 자료사진
김인숙 소설 ‘모든 빛깔들의 밤’
기차 사고로 죽은 여덟달 아이
조부 대까지 거슬러오르는 ‘악연’
기차 사고로 죽은 여덟달 아이
조부 대까지 거슬러오르는 ‘악연’
김인숙 지음/문학동네·1만3000원 김인숙 소설 <모든 빛깔들의 밤>의 중심에는 기차 전복 사고로 희생된 여덟달 아기의 죽음이 있다. 불붙은 기차 안에서 아기를 살리고자 창밖으로 던졌으나 정작 아기만 죽고 자신은 살아남은 엄마 조안, 아기의 아빠이자 조안의 남편인 희중 그리고 조안의 남동생 상윤이 당사자로서 사건을 반추하고 그 후유증을 감당한다. 소설 앞부분에서 갈등은 일차적으로 조안의 죄책감에서 비롯한다. 어쨌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당위가 조안이 빠져든 자책과 자폐의 구렁에 맞서는 형국. “어쨌든 그들은 살아 있고, 지금도 여전히, 함께 있는 것”이라고, 아이의 죽음 뒤 모처럼 아내와 잠자리를 함께한 희중이 되뇔 때 그는 ‘삶이라는 당위’의 수호자로서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던 그가, 조안을 삶 쪽으로 견인하려는 노력과 인내가 한계에 부닥친 나머지, “나는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었어요” “아이를 죽인 건 조안이라고요!”라 외치는 순간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던 쪽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우선, 조안과 희중 부부의 아파트 위층에 살게 된 덩치 큰 웹툰 작가 백주가 아이 잃은 부부의 아픔 한가운데로 끼어든다. “애가 너무 웁니다”라고, 백주가 희중에게 항의할 때만 해도 그가 고양이 울음소리를 잘못 들었을 것이라 짐작했던 독자는 머지않아 그것이 진짜 죽은 아이의 울음소리일 수도 있다는 쪽으로 생각을 고쳐먹게 된다. ‘사실’로서 진술되는 이런 대목 때문이다. “그러니까 귀신들… 그를 쫓아와 그의 집에서 살고 있는 귀신들. 울음소리를 내고, 비명을 지르고, 화를 내는 귀신들. 때로는 웃고, 그에게 장난까지 치는 귀신들.” 그 귀신들이 다름 아니라 아이가 희생된 기차 사고를 백주가 가까이에서 목격한 뒤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아파트 위아래층에 살게 된 세사람이 자신들도 모르는 ‘인연’으로 얽혀 있음을 알게 한다. 다음, 희중의 경우. 조안을 향한 인내가 한계에 이르는 한편 백주의 ‘주제넘은’ 참견에도 분개하던 어느 순간 그는 백주가 그린 인터넷 만화의 이런 지문에 맞닥뜨린다. “아이가 울고 있었어. 죽게 될 걸 알았던 거지. 그런데 누구의 죄로 죽는 걸까? 불쌍한 아이는 절대로 알지 못할 거야. 아버지, 누구의 잘못인지 얘기해줄래요?” 이 지문은, 백주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희중이 애써 외면하고 있던 지난 일로 그와 독자를 안내한다. 그가 열두살이던 때 사고를 위장해 자살한 아버지의 죽음이 그것. 교사인 아버지가 근무하던 학교에서 어린 여자아이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고, 희중은 사건이 벌어진 날 아버지가 쓴 우산에서 핏물이 흘러내렸으며 아버지의 바지 주머니에서 여자아이의 머리핀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들려주었던 터. 아이다운 호승심 또는 공명심에서 저도 확신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퍼뜨렸던 것인데, 그것이 아버지를 자살로 몰아간 직접 원인이 되었는지는 소설이 끝나도록 불투명하다. 백주의 웹툰을 본 직후 따로 사는 어머니를 찾아간 희중은 “…사고도 유전이 아닌가 모르겠어요”라고 불쑥 말하는데, 아버지의 죽음이 자살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의 이런 말은 무언가를 감추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그것을 하나의 장면으로 보여주는 것이 그가 꿈에서 본, 여덟달 아기를 안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라 하겠다. 그러니까 열두살 희중의 세치 혀 때문에 죽은 아비가 손자의 죽음을 초래한 원인이라는 것. 그 결과 소설 속 이런 문장이 무서운 울림으로 다가오지 않겠는가. “그 모든 것은, 생의 어느 한순간에 시작되는 불행은, 단지 모두 다 우연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소설이 막바지에 이르면 희중 아비의 죽음이 백주의 삶과 지니는 또 다른 치명적인 악연이 드러나고, 심지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예상치 못한 반전을 마련해 놓고 있기도 하다. 이 소설은 ‘마침내 모든 빛깔을 밤이 당겨갈 때’라는 제목으로 2012년 문학동네 카페에 연재했던 것인데, 4월에 있었던 참극을 감안해 출간을 늦췄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책에는 ‘작가의 말’이 따로 붙어 있지 않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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