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20주년 기념호로 나온 <문학동네> 겨울호는 작가 열한사람의 단편을 특집으로 삼았다. 사진 왼쪽부터 김연수, 김훈, 박민규, 천명관. <한겨레> 자료사진
‘문학동네’ 창간 20주년 기념호
김훈 김연수 등의 단편 열한편
박민규 천명관은 미래사회 빗대
김훈 김연수 등의 단편 열한편
박민규 천명관은 미래사회 빗대
김훈 외 지음
문학동네·1만5000원 계간 문학지 <문학동네>가 겨울호로 창간 20주년을 맞았다. 1994년 겨울호로 나온 이 잡지 창간호는 송기원의 <여자에 관한 명상>, 신경숙의 <외딴 방>, 김훈의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세 장편을 한꺼번에 연재하고, 지금은 작고한 이청준·이문구의 단편을 실었다. 그로부터 한호도 거르지 않고 통권 81호로 나온 창간 20주년 기념호는 작가 열한사람의 단편소설로 특집을 삼았다. 김훈 김연수 은희경 성석제 김영하 박현욱 김언수 천명관 박민규 김유진 손보미. 김연수와 손보미를 제한 나머지 작가는 모두 <문학동네>로 등단하거나 이 잡지가 주관하는 문학상을 받은 이들이다. 특집 단편 열한편은 한국 단편 미학의 현주소를 보여줌과 동시에 작가들이 포착한 한국 사회의 환부와 통증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김훈의 <영자>는 노량진 고시촌을 배경 삼아 이 시대 청춘의 좌절과 회한을 아프게 그린다. 10층짜리 고시텔과 공무원 시험 준비생들의 일상을 묘사하는 첫 장면은 기자 출신 작가의 글답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구체적이다. 주인공 ‘나’는 이 건물 원룸에 세든 청년으로 9급 지방 행정직 시험을 준비중이다. 남녀 동거를 알선해 주는 인터넷 카페를 통해 영자를 소개받고 제 방에서 1년 반 동안 동거한 이야기가 소설의 얼개를 이룬다. 9급 지방 보건직 시험에 재수중인 영자는 시간당 5천원을 받고 대형 식당에서 식재료를 분류해서 다듬는 일을 하거나 강남의 이탈리아 식당 화장실 담당으로 시간당 6천원을 받는 ‘알바’를 하면서 시험 준비를 한다. 동거하는 두사람은 밥도 따로 먹고 관리비도 분담하지만 밤이면 자연스레 몸을 섞는다. 영자의 화장실 알바에 필요한 단풍잎을 줍는 데 따라간 게 동거 중 유일한 나들이였을 정도로 둘의 관계는 삭막하고 건조하다. ‘나’가 먼저 시험에 합격하면서 동거를 그만두게 되자 영자는 한달치 관리비 9만원을 넣은 봉투만 남긴 채 짐을 싸서 나가고, 경북 산골 마을 면사무소에 근무하게 된 ‘나’는 어느날 문득 술기운의 도움을 받아 영자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 보지만 사용하지 않는 번호라는 기계음이 돌아올 뿐이다…. 김연수의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는 10여년 전 연인 관계로 지내다가 헤어진 두 인디 가수를 등장시킨다. 세월호 침몰 다음날 ‘나’에게 오랜만에 메일을 보내온 ‘희진’은 자신이 일본 도쿄 요쓰야 한국문화원에서 초청 공연을 하게 된 정황을 설명하는데, 그 배경에는 뜻밖에도 10년 전 두사람의 일본 여행이 있다. 당시 그들이 들렀던 어느 카페에서 노래를 함께 들었던 일본인이 10년 뒤 희진을 초청했던 것. 그 일본 여행 이후 둘은 헤어지게 되었던 모양인데, 희진의 메일을 통해 ‘나’는 그때 카페 비망록에 자신이 써 놓고도 까맣게 잊고 있던 문장을 돌려받는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지켜볼 꽃잎이 많이 남아 있다. 나는 그 꽃잎 하나하나를 벌써부터 기억하고 있다는 걸 네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 뿐.-2014년 4월16일.” 위태로운 연인 사이의 10년 뒤 미래를 기약하는 프러포즈로 이해할 수도 있을 이 날짜는 소설 앞부분에서 언급된 세월호 침몰 사건과 맞물려 또 다른 울림을 준다. 박민규와 천명관은 나란히 에스에프적 상상력에 기대어 현실을 비판한다. 박민규의 <대면>은 사람이 발 딛고 사는 땅 자체가 신의 몸이 된 먼 미래 사회를 배경 삼는다. 순례에 나선 이들이 마침내 신의 머리 부분에 이르지만 그들을 맞는 것은 울고 있는 아이. 순례 도중 어린 아들을 잃은 라까는 무기력한 신의 머리를 떼어내고 그 자리에 대신 제 아들을 끼워 넣는다. 천명관의 <퇴근>에서는 실업률이 90퍼센트를 넘고 빈부격차가 극에 달한 미래 사회를 그리는데, 집을 나간 줄 알았던 아버지가 사실은 영원히 퇴근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는 결말이 시사적이다. 이밖에도 박현욱과 김언수의 단편은 각각 강한 개성을 지닌 인물을 통해 삶과 세계를 새롭게 보도록 하며, 성석제는 상상력이 고갈된 작가를 등장시켜 창작의 고뇌를 그린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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