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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미얀마의 공기와 햇볕과 정적을 찬양하다

등록 2014-12-18 20:44

<바간의 꿈>의 작가 서정인은 “제국주의 침략자들도 빼앗아가지 못한 천혜의 햇볕이 미얀마 사람들의 의젓함의 바탕인 것 같았다”고 말했다. 사진은 작가가 미얀마 여행 중 양곤 노점상에서 차를 사 마시는 모습. 양영 제공
<바간의 꿈>의 작가 서정인은 “제국주의 침략자들도 빼앗아가지 못한 천혜의 햇볕이 미얀마 사람들의 의젓함의 바탕인 것 같았다”고 말했다. 사진은 작가가 미얀마 여행 중 양곤 노점상에서 차를 사 마시는 모습. 양영 제공
‘현대문학’ 연재중단 서정인 소설
가난하지만 행복한 그들의 ‘비밀’
이제하도 연재 중단 소회 털어놔
바간의 꿈
서정인 지음/양영·1만5000원

“이승만은 젊은 사람들의 피로 물러났고, 박정희는 부마 사태의 군중 운집에 놀란 그 자신의 오른팔이 쏜 총탄에 무슨 개통식에서 마신 막걸리에 어린 기집들 끼고 위스키 섞다가 쓰러졌고, 전두환은 2700억인가 얼마를 꼬불쳤다가 290만원의 오리발 내밀고, 노태우도 그와 난형난제였다. 전직 대통령들 둘이 나란히 법정에 섰다.”

원로 작가 서정인(78)의 소설 <바간의 꿈> 한대목이다. 주인공이 친구와 나누는 대화의 일부인데, 이 대목 때문에 작가는 큰 곤욕을 치렀다. 이 작품은 본래 지난해 월간 <현대문학> 7월과 8월 두차례 연재되었지만, 9월호에 해당하는 위 대목이 문제가 되어 잡지사에서 게재를 거부한 것. 특히 박정희의 죽음을 언급한 것에 대해 잡지 편집진이 곤란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지만 이 대목은 소설 전체로 보아서는 지나가는 언급일 뿐이며, 작가가 하필 박정희만 꼬집어 비판한 것도 아니다. 인용문에 이어지는 구절은 이러하다.

“김영삼은 아들이 말아먹고 감옥에 갔고, 김대중은 세 아들들 모두가, 그리고 덤으로 최측근 가신이, 얼마를 집어먹었는지 감방에 갔다. 노무현은 600만불의 사나이였는데, 그 밑에서 감투를 쓴 한 대학 교수가 그건 생계형이라고 했다. 고부 군수가 2000냥, 3000냥 백성의 피와 땀을 착취한 것이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서였냐? 피가 거꾸로 흐른다.”

보다시피 작가는 이승만에서 노무현에 이르는 역대 대통령이 저지른 잘못을 두루 지적하고 있는 것. 하필 박정희 부분만 문제삼을 일은 아니었다. 서정인은 18일 <한겨레>와 통화에서 “잡지 편집권은 존중해야겠지만, 문장 하나를 가지고 트집잡는 식의 좁은 시야로 어떻게 <현대문학>처럼 중요한 문예지를 편집하고 제작하겠다는 것인지…”라며 안타까워했다.

서정인은 그렇게 뜻밖의 ‘봉변’을 당한 소설 원고를 한동안 내버려두었다가 사태가 일어난 지 1년 정도가 지난 올 여름 다시 매달려서 완성시켰다. <바간의 꿈>은 미얀마의 불교 성지 바간을 배경으로 삼은 작품이다. 방글라데시와 미얀마, 캄보디아처럼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오히려 부자 나라 사람들보다 행복감이 높은 까닭을 여행자의 눈으로 확인해 보자는 것이 소설의 취지.

“미얀마 사람들의 눈들은 초롱초롱했다. 타고난 그들의 미소 속에 감춰진 조상 전래의 지혜는 몰래 그들을 지켜주었다.(…)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세상의 작은 한 구석에서 열심히 살았다. 민족주의가 아니라 인간적 선량함이 그들의 미덕이었다.(…)자원을 활용하지 않은 그들의 삶은 가난하고 힘들었지만, 문명과 기술에 오염되지 않은 생래의 원시적 활력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손대지 않은 자연의 풍요로움이 그들의 가난을 피폐가 아니라 재산으로 만들었다.”

주인공이 바간 여행 중 만난 40대 이탈리아 남자는 미얀마의 공기와 햇볕과 정적을 찬양하며, 책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을 그것들로부터 배운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중·일을 비롯한 동양이 서양 문명을 따라가는 세태에 대한 진한 아쉬움을 표한다. 작가는 “2~3년 전쯤 혼자서 다녀왔던 미얀마 여행 경험을 소설로 풀어냈다”며 “전통 방식으로 사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 좋았는데, 그들 역시 갈수록 서구 문명의 영향권 밑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편 서정인에 이어 <현대문학>에 소설 연재 청탁을 받고 ‘일어나라, 삼손’이라는 작품 첫회분을 2014년 1월호용으로 보냈다가 역시 석연치 않은 이유로 ‘퇴짜’를 맞은 작가 이제하(77) 역시 새로 낸 산문집 <모란, 동백>(이야기가있는집)에서 당시 사태를 회고했다. 그는 “100여회 써서 넘긴 1회분 배경에 ‘박정희 유신’과 ‘87년 6월 항쟁’이라는 시대 배경을 서술하는 단어 두 개가 들어간 것”과 “소설의 배경이 되는 어느 지방 도시를 서술하는 대목에서 ‘친일 문제가 또 불거져 나왔다’ 같은 글귀가 들어”간 것이 게재 거부 사태를 불러온 것으로 이해한다면서 이렇게 썼다. “혼의 자유라는 테제가 중심이 되지 못한다면 문학도 문예지도 한낱 남루한 패션으로 전락하고 만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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