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남대문시장에서 안경사로 일하는 시인 황인산 씨.
남대문시장 안경사 시인 황인산씨 첫 시집 ‘붉은 첫눈’ 발간
“남의 눈을 밝게 해 주는 게 그 자체로도 보람 있는 일이지만, 거기에 더해서 혜안을 갖게 해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죠. 그런 점에서 안경 만들기와 시 쓰기는 통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안경사로 일하는 시인 황인산(51)씨가 첫 시집 <붉은 첫눈>(삶창)을 펴냈다. 1989년부터 안경사로 일해 온 그는 이듬해 한국방송통신대에 진학해 교내 시 창작 모임 ‘풀밭’ 동인으로 활동해 왔다. 어언 25년 그 사이 2009년에는 ‘개심사 애기똥풀’이라는 작품으로 ‘제15회 지용신인문학상’도 받았다.
“어서 오십시오./ 먼저 시력 검사를 해볼까요? 눈을 형식적으로 달고 다녔군요. 걱정 마세요. 안 보이면 제 각막이라도 이식해 드릴게요. 어지럽다고요? 그럼 어지럼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제가 당신의 발이 되어 드리면 되죠.”(‘아이리스안경원은 세일 중’ 앞부분)
안경점 풍경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한 시를 비롯해 시집에는 안경사의 눈으로 길어올린 작품이 여럿 들어 있다. 폐지 주워 모은 돈 3만원으로 값 나가는 이중초점렌즈 안경을 원하는 의정부 할아버지(‘이중초점렌즈’)나 몇푼 안 되는 생활보조금을 헐어 돋보기를 맞추러 온 독거 노인(‘여름 난로’)에게 원가에도 못 미치는 가격에 안경을 만들어주는 이야기는 그의 사람됨을 짐작하게 한다.
월~토요일 주6일, 아침 9시~저녁 7시, 꼬박 매장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시는 주로 밤에 쓴다. 낮에 시상이 떠오르면 서랍 안에 준비해 둔 메모장에 급히 적는다.
“구청도 이사 간 용산구청 앞 굴다리 밑/ 빛바랜 농성장/ 신계동 철거민 아줌마가 써놓은/ 입주권 보장하라!/ 주거권 보장하라!/ 합판집 벽에 무늬로만 살아 있는 탈색된 붉은 꿈.”(‘이 편한 세상’ 부분)
시집에는 힘없고 소외된 이웃들 이야기도 여럿 들어 있다. 직접 운영하던 골목 슈퍼를 정리하고 대형 할인매장 계산대 일을 하게 된 아줌마(‘이마트 미니슈퍼 아줌마’), 수십년 만에 친척이 다녀간 뒤 간첩으로 몰려 결국 자살한 피난민 할아버지(‘황해 물을 다 마시고 간 사내’), 농촌 폐가 정리사업으로 30만원을 받고 살던 집을 허무는 시골 아낙(‘새살새살’) 등이 그들이다. 고향인 충남 서천을 그리워하는 시들이 있는가 하면, 신랄한 풍자로 현실을 꼬집는 시들도 보인다. 안경사 시인은 그 모든 시들이 자신에게는 마음을 닦는 공부요 종교와도 같다고 말한다.
“저는 동시대 같은 계급 사람들의 삶에서 시의 모티브를 가져옵니다. 제가 어렵게 살아왔으니까 자연히 저처럼 어려운 사람들에게 마음이 가는 거죠. 일상이 바쁘고 힘들더라도 시를 쓰면 몸과 마음이 두루 편해지는 느낌을 받아요. 그런 점에서 시 쓰기는 저에게 종교와 다르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시를 쓸 뿐만 아니라 산다고 할까요.”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황인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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