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악마의 시>가 이슬람을 모욕했다는 혐의로 ‘파트와’ 살인 선고를 받았던 작가 살만 루슈디가 13년간 이어진 파트와 시절을 회고한 자서전 <조지프 앤턴>이 최근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사진은 2012년 캐나다 토론토 국제영화제에 참석한 루슈디. 토론토/AP 연합뉴스
살만 루슈디 자서전 ‘조지프 앤턴’
소설 ‘악마의 시’로 이슬람의 표적
살해판결 ‘파트와’ 아래 산 세월
“목숨 대가 치르더라도 한계 도전”
소설 ‘악마의 시’로 이슬람의 표적
살해판결 ‘파트와’ 아래 산 세월
“목숨 대가 치르더라도 한계 도전”
<조지프 앤턴>은 인도 출신 영국 작가 살만 루슈디가 쓴 자서전이다. 제목은 그가 1989년부터 2002년까지 썼던 가명. 조지프 콘래드와 안톤 체호프 두 작가의 이름을 조합해서 만들었다.
루슈디가 가명을 써야 했던 것은 그의 소설 <악마의 시>가 이슬람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이란 지도자 호메이니가 그에게 내린 사형선고 ‘파트와’ 때문이었다. 1989년 밸런타인데이(2월14일) 아침 그에게 그 소식을 전하면서 기분을 묻는 방송 리포터의 질문에 그는 “기쁘진 않소”라고 짐짓 의연하게 대꾸했지만, 속마음은 격렬했다. ‘이젠 죽었구나. 앞으로 며칠이나 더 살 수 있을까? 아마도 한 자릿수가 고작이겠지.’
<조지프 앤턴>(김진준·김한영 옮김, 문학동네 펴냄)은 그렇게 루슈디가 파트와와 더불어 산 날들의 기록이다. 당국의 조언에 따라 가명을 고르고 경찰의 철통 경호망 안에 머물러야 하며 그것도 모자라 수시로 이사를 다녀야 하는 것이 파트와 아래의 삶이었다. 이혼한 부인과 함께 사는 아들을 만나거나 마음에 드는 상대와 연애를 하기 위해서도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하는 소동을 거쳐야 한다. 루슈디에 대한 위협은 실제적이며 엄혹했다. <악마의 시> 일본 번역자가 살해당하고 이탈리아 번역자와 노르웨이 출판인은 각각 칼과 총에 맞아 중상을 입지 않았겠는가. 루슈디는 자신을 3인칭 ‘그’ 또는 ‘루슈디’로 일컬음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상황과 자신의 생각 및 행동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전달하고자 한다.
<악마의 시>가 나름 이슬람교의 계시에 예술적으로 동참한 작품이라 생각했던 루슈디는 언론 기고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옹호하는 한편, 경찰 주선으로 영국 무슬림 유지들과 만나 굴욕적인 문서에 서명을 하면서까지 호메이니와 무슬림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기를 꿈꾸기도 한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도 바랐던 결과를 얻는 데에 실패하고, 그는 절망의 순간이면 무절제하게 알코올에 의존하거나 가까운 이에게 신경질을 부리고는 한다. “파트와 반대운동을 벌이느라 작가로서의 본분(글쓰기)을 포기하다시피 했”다는 자괴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살해 위협과 책 화형식 같은 어둠의 맞은편에는 한줄기 희미한 빛과도 같은 우군이 있었다. 미국출판협회와 미국서점협회, 미국도서관협회는 파트와 선고 일주일여 뒤 <악마의 시> 미국판 출간에 맞추어 <뉴욕 타임스>에 전면광고를 실었다. 이런 내용이었다.
“자유인은 책을 씁니다. 자유인은 책을 펴냅니다. 자유인은 책을 팝니다. 자유인은 책을 삽니다. 자유인은 책을 읽습니다.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국민정신에 입각하여 독자 여러분이 전국 방방곡곡의 서점과 도서관에서 언제든지 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수전 손택, 노먼 메일러, 존 어빙, 크리스토퍼 히친스 같은 저명 작가들은 물론 록밴드 유투(U2)의 보컬 보노 같은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루슈디에 대한 위협에 제 일처럼 발 벗고 나서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파트와의 표적으로 세계적 유명 인사가 된 루슈디가 괴짜 은둔 작가 토머스 핀천과 통화를 하고 저녁을 같이 먹는가 하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프랑스어로 통화를 하고 첩보물 작가 존 르카레이와 지상 논전을 벌이는 등의 일화들도 흥미롭다.
파트와 아래에서도 일상은 이어지는 것이어서, 그 사이에 루슈디는 전처와 이혼 소송을 벌이고 새로운 연인을 만나 아이를 얻고 다시 결혼과 이혼을 하며 그 이혼의 빌미가 된 외도에 빠지기도 한다. 사춘기를 통과하는 아들 자파르가 크고 작은 말썽을 일으키는가 하면 그 어머니인 첫 부인 클래리사는 암에 걸렸다가 회복하는가 했지만 결국 재발되어 숨을 거두고 만다. 아들을 위해 쓴 책 <하룬과 이야기 바다>를 비롯해 <무어의 마지막 한숨> <분노> 같은 작품을 쓴 것 역시 파트와 기간 중이었다.
1998년 9월24일 이란 외무장관과 영국 외무장관이 파트와가 끝났다는 공동선언을 발표했지만, 영국 경찰이 루슈디에 대한 경호를 완전히 해제한 것은 그로부터 3년 반이 지난 2002년 3월29일이었다. 조지프 앤턴은 살만 루슈디로 돌아왔다. 13년 만이었다. 그토록 긴 세월 동안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그가 지키려 했던 문학의 가치는 무엇일까.
“문학은 우주를 조금 더 열어보려고 노력한다. 인류가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세계의 총량을 조금이라도 증가시켜 결국 인간의 가능성을 확대하려고 노력한다. 위대한 문학은 이미 알려진 세계의 변경까지 나아가 언어, 형식, 잠재력의 한계를 확장함으로써 세계가 전보다 더 크고 더 넓게 느껴지도록 한다. (…) 변경으로 나아가 한계에 도전하는 예술가들은 종종 막강한 저항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그래도 그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설령 자신의 안락을, 때로는 목숨을 대가로 치르더라도.”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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