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멋모르고 하의를 머리에 쓰기 전에

등록 2015-02-26 21:20수정 2015-10-24 00:33

표절론
남형두 지음/현암사·3만2400원

슬갑도적(膝甲盜賊)이란 말이 있다. 양반집에 들어간 도적이 ‘슬갑’이란 하의를 훔쳤으나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몰라 머리에 쓰고 다녔다는 이야기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글을 훔쳐 자신의 글인 양 행세한 것을 빗댄 것이다. 뜻도 모르고 글을 인용하여 오해를 불러일으키니 그 민망함이 바지를 뒤집어쓰고도 모른 일에 비유한 것이리라. 시나브로 스스로 도둑이 될까 두려운 순간이다.

표절에 론(論)이 붙었다. 논할 론, 한국민족대백과 사전에서는 이 개념을 ‘사리를 판단하여 시비를 밝히는 문체’라 설명했다. 어떤 것은 표절이고 어떤 것은 표절이 아닐까? 이 아리송한 문제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접근한 국내 최초의 ‘표절 전문 체계서’가 나왔다.

책은 표절의 정의에서부터, 표절의 유형, 검증 방법, 풍부한 사례를 방대하게 담아 누구든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곁에 두고 언제든 펼쳐 볼 수 있도록 했다. 흔히 혼동하는 저작권법과 표절과의 관계도 면밀히 살폈다. ‘협의의 표절’과 ‘광의의 표절’을 구분해 저작권법과의 관계를 법리적으로 접근해 인지하지 못한 실수를 미연에 줄이고자 노력한 부분이 돋보인다.

또, 인용과 표절에 대한 개념을 뒤흔들 수 있는 인터넷의 ‘에디톨로지’가 성공하려면 인용은 점차 더 중요시될 것이란 지적도 흥미롭다.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의 지식에 손쉽게 접근한다고 해서 ‘정직한 글쓰기’의 가치가 쇠퇴하지는 않을 것이며, 외려 디지털로 구축된 검색기술을 통해 표절 검색이 더 용이해질 것이란 전망이다. 만약 이 흥미로운 내용들을 모두 살펴볼 여유가 없다면 권말에 실은 ‘표절 백문(百問)’부터 보면 되겠다. 흔히 궁금해 하는 질문을 싣고 답이 될만한 페이지를 친절히 표시했다.

지은이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글 쓰는 이들이 “구더기가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며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파고든다.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지만 표절에 대한 일관된 논의는 무르익지 못한 게 현실이다. 지은이는 ‘왜 그런가’를 한국적 상황의 특수성으로 설명한다. 첫째, 학문적 관심보다는 학문외적 ‘낙인 효과’에 논의가 집중되어 있음을 지적했고, 둘째로는 학계에 만연한 ‘침묵의 카르텔’을 꼬집었다. 2000년 당시 젊은 비평가였던 이명원이 국문학계 거장의 표절을 폭로해 충격을 준 뒤, 눈에 띄는 ‘내부고발’이 없는 이유다.

“이성적이고 합리적 논의를 위해 누군가 판을 벌여야 한다” ‘모난 돌’을 자처한 지은이는 세 편의 논문을 한 해에 한 편씩 3년간 집필하고, 다시 윤문과 편집에만 3년의 시간을 더 투입해 700쪽이 넘는 ‘역작’을 펴내고서도 논의는 이제야 비로소 시작이라며 몸을 낮춘다.

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