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해운대 달맞이언덕 추리문학관에서 만난 작가 김성종. “애거사 크리스티, 아서 코넌 도일, 롤링 같은 영국의 장르 작가들이 영문학을 훼손한 게 아니라 더 풍성하고 다양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사진 최재봉 선임기자
김성종 연작 추리소설집 출간
달맞이언덕과 카페 ‘죄와벌’ 무대
“한국전쟁 소설 제대로 쓰고 싶어”
달맞이언덕과 카페 ‘죄와벌’ 무대
“한국전쟁 소설 제대로 쓰고 싶어”
김성종 지음/새움·1만3800원 “해운대 달맞이언덕 위에는 여름철이면 짙은 안개가 똬리를 튼다. (…) 그 안개는 나에게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달콤한 속삭임이었고, 연인의 부드럽고 촉촉한 손길이었고, 많은 비밀을 간직한 삶의 끝없는 미로였고, 방황하는 내 고독한 영혼의 동반자였다.”(‘작가의 말’) 한국을 대표하는 추리 작가 김성종(74)이 부산 해운대 달맞이언덕을 배경 삼은 연작 추리소설집 <달맞이언덕의 안개>를 내놓았다. 원로 추리 작가 ‘노준기’가 일인칭 주인공으로 등장해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등 안개가 감춘 크고 작은 비밀을 풀어 나가는 이야기다. 탐정 셜록 홈스에 빗대어 ‘홈스 선생’으로 불리는 노준기는 달맞이언덕의 단골 카페 ‘죄와벌’에서 커피와 와인을 마시며 작품을 구상하고 사건을 해결한다. 달맞이언덕에는 실제로 그 이름을 단 카페가 있는데, 다름 아니라 작가 자신이 운영하는 추리문학관 1층에 있는 곳이다. 김성종은 1981년 아무런 연고도 없는 부산으로 내려와 정착했으며 1992년에는 달맞이언덕에 5층짜리 건물을 짓고 한국 최초의 문학관인 추리문학관을 개관했다. 25일 추리문학관에서 만난 그는 “한국의 문학 교육과 문단 풍토는 추리소설을 비롯한 장르문학을 지나치게 폄하한다”며 “문학의 모든 장르는 자유롭게 공존하며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게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김성종이 처음부터 추리소설을 쓴 것은 아니다. 그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와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해 이른바 본격소설 작가로 출발했지만, 전쟁의 비극을 추리적 기법으로 그렸다는 심사평과 함께 1974년 <한국일보> 창간 20주년 장편 공모에 당선한 <최후의 증인> 이후 추리 작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사방에서 추리소설을 써 달라는 청탁이 왔고 그에 응하다 보니 어느덧 내가 추리 작가가 돼 있더라”고 그는 말했다. 텔레비전 드라마로 방영돼 큰 인기를 끈 <여명의 눈동자>는 1975년부터 1981년까지 <일간스포츠>에 연재되었다. 연재소설 역시 좋은 반응을 얻었는데, 그 결과 그는 신문 연재소설 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어느날 장기영 사장이 부르더니 소설을 하나 더 연재하라는 거예요. <여명의 눈동자>를 아직 연재하고 있을 때였으니까 같은 이름을 피하는 게 좋겠다면서 ‘추정’이라는 가명도 지어 주면서 말이죠. 그래서 그 이름으로 연재한 게 <제5열>입니다. 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암살한다는 내용인데, 연재가 끝나고 얼마 안 있어 실제로 10·26이 일어났죠.” <달맞이언덕의 안개> 주인공 노준기는 ‘도망간 여자’라는 시칠리아산 와인을 즐겨 마시는데, 작가는 그 이름을 제목 삼은 장편의 탈고를 앞두고 있다고 밝혔다. 청소년소설도 쓰고 있고 노준기의 활동 무대를 전국으로 넓힌 작품도 구상 중이지만, 작가가 필생의 작업으로 여기는 작품은 따로 있었다. “제가 가장 쓰고 싶은 것은 한국전쟁 소설입니다. 세계사적인 의미를 지니는 전쟁을 겪은 것에 비하면 우리에게는 이렇다 할 전쟁 문학이 없어요. 전쟁 현장을 제대로 묘사하고, 보도연맹 사건 같은 인권 유린과 민간인 학살 문제도 외면하지 않는 제대로 된 소설을 쓰고 싶어요. 그동안 자료는 열심히 모았고 아마 올해부터 쓰기 시작할 것 같습니다. 죽을 때까지 완성할지 모르겠지만, 끝내지 못할 소설이라도 쓰는 데까지는 쓰고 싶어요.” 전쟁을 비롯한 한국 현대사의 질곡에 대한 관심은 이번 책에서도 뚜렷하다. 책에 실린 연작 25편 중에는 인혁당 사건을 연상시키는 독재 치하 조작 사건과 고문, 빨치산과 비전향장기수 등을 다룬 작품이 여럿 들어 있다. 말미에 실린 두 작품 ‘죽음의 땅에 흐르는 안개, 그리고 개들의 축제’와 ‘아, 달맞이언덕의 안개여!’는 원자력발전소 폭발과 남북간 전쟁을 그리고 있기도 하다. “극한 상황에 놓인 인간의 아픔과 비극을 그려 보고자 극단적인 상황을 설정해 보았는데, 사실 가능성이 없지도 않은 이야기”라고 작가는 말했다. 부산/글·사진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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