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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담배를 잊지 못하는 곳 그 어딘가

등록 2015-04-02 20:48

담바고 문화사
안대회 지음/문학동네·3만원

“천지의 마음은 지극히 인자하고 만물의 영장은 사람이다. 천지는 사람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고 해로움을 제거해주고자 안달이 날 지경이다. 이 풀이 이 시대에 출현한 것을 보면, 천지의 마음을 엿보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조선 제22대 왕 정조가 1796년에 쓴 <남령초 책문>의 한 구절이다. 책문은 왕이 신하들에게 정책을 질문하는 일종의 논술 시험이다. 여기서 ‘이 풀’(남령초)이 뭘까? 바로 담배다. 끔찍한 애연가였던 정조는 만백성이 담배 피울 날을 꿈꾸며 신하들에게 대책을 제시하라고 했다. 담배 예찬을 넘어 담배 숭배에 가깝다. 220년 전이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런가, 그런 게 가능했다.

<담바고 문화사>는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가 조선 중기 이후 300년의 사회·문화·경제를 ‘담배’라는 열쇳말로 섬세히 들여다본 책이다. 갈수록 담배는 퇴출돼야 할 혐오품으로 찍히고 있다. 그럼에도 지은이에게 담배는 “문화사적인 면에서 꼭 한번은 제대로 탐구해보고 싶은 유혹”이었다. 480쪽에 이르는 두툼한 분량이지만, 담배를 둘러싼 흥미진진한 논쟁에 풍부한 문헌 기록과 민화 사진들을 곁들여 읽는 맛이 쑬쑬하다.

담배의 옛이름 ‘담바고’는 포르투갈어 ‘타바코’(tobaco)에서 왔다. 담배가 한반도에 건너온 것은 17세기 초 일본에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담배의 수입과 유행을 기록한 가장 빠른 문헌은 유몽인의 <담파귀설>(1612년)이다. “일본 장사치가 부산 포구에 배를 대고 약 한 가지를 팔았다 … 장안의 남녀가 어린애고 늙은이고 가리지 않고 병이 있거나 없거나 즐겨 태워서 연기를 마셔대니 코를 비트는 악취가 거리에 가득했다.”

담배는 당시에도 격렬한 논쟁거리였다. 효용론과 건강론의 대립뿐 아니라, 신분사회의 엄격한 위계질서에 대한 태도도 찬반을 갈랐다. 구한말의 허훈은 ‘금연문’에 이렇게 썼다. “사람의 장부를 까맣게 하고 얼굴을 검게 하네. 거만한 태도를 조장하고 원기는 담배 탓에 깎이네.” 본래 담배를 피우던 근재 박윤원은 자기 담뱃대를 기생이 훔쳐 피우는 것을 본 뒤 완강한 금연론자로 돌아섰다.

다른 한편에선 담배의 멋과 맛에 취했다. 문인들에게 담배는 영감의 원천이었다. 여인의 흡연은 연정을 자아냈다. 재력가들은 공예품 끽연구를 ‘궁극의 사치’로 삼았다. 재기발랄한 문인 강흔은 ‘담배를 잊지 못하는 곳 그 어딘가’라는 10편의 연작시에서 끽연의 정취를 절절히 묘사했다. 잠에서 막 깬 뒤 새벽 창가, 호롱불 가물대는 가을 주막, 시험장으로 과거 보러 가는 날, 한밤중 독경하는 사찰, 겨울 하늘에 눈이 막 날릴 때가 그 일부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 책의 지은이는 담배를 피울까? 알아봤는데, 기자의 짐작은 틀렸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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