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 끝에 탈북한 이야기를 다룬 자전소설 <붉은 넥타이>의 작가 장영진. “그간 나온 북한 관련 책들에서는 체제나 이념만 부각됐을 뿐 사람 이야기를 제대로 다루지는 못했다. 나는 문학성 높고 감동적인 북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탈북 동성애 작가 첫 소설
성정체성 찾아 휴전선 넘어
“민족 아픔 녹이는 글 쓰고파”
성정체성 찾아 휴전선 넘어
“민족 아픔 녹이는 글 쓰고파”
장영진 지음/물망초·1만6000원 남한 내 탈북자 수가 3만명 가까이에 이르고 몇몇 탈북 문인은 ‘망명북한작가센터’라는 이름으로 국제펜클럽에 가입했다. 탈북 경험과 한반도 통일을 소재로 삼은 시와 소설도 제법 활발하게 나온다. ‘탈북문학’이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는 분위기다. 문제는 탈북 작품이 대체로 천편일률적이라는 것. 북쪽 인민의 극심한 기아, 중국에서 겪은 비인간적 처우, 우여곡절 끝에 남한에 정착하기까지 과정이 차례로 서술되는 것이 보통이다. 탈북 작가 장영진(56)의 첫 소설 <붉은 넥타이>는 여느 탈북문학 작품과 차별성이 우선 두드러진다. 여기서도 기아에 시달리는 북쪽 현실과 험난한 탈북 과정이 묘사되기는 하지만 핵심은 정작 다른 곳에 있다. 그런 차별성은 이 자전소설 작가의 독특한 개성에 말미암은 바가 크다. “남한 사회의 이방인인 탈북자, 그리고 이성애 사회의 이방인인 성소수자…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었다. 이 사회가 나를 받아들이기 이전에, 내가 나를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을까? 두려움이 밀려왔다. 목숨을 걸고 휴전선을 넘을 때와는 또 다른 차원의 두려움이었다.” 주인공 ‘장영진’을 포함해 모든 등장인물이 실명 그대로인 이 작품에서 ‘나’가 북녘땅을 떠나온 동기는 여느 탈북자들과는 사뭇 다르다. 동성애자인 그는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없는 채로 북쪽에서 여성과 결혼까지 했지만,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을 “철창 없는 감옥”으로 여긴 나머지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탈북을 택했던 것. 작가 자신 1996년 두만강을 통해 중국으로 건너가서 1년1개월 동안 남한으로 내려올 기회를 엿보다가 여의치 않자 다시 북녘땅으로 들어가 휴전선 동쪽을 걸어서 남하했다. 소설에도 그려진바, 그런 그가 탈북 뒤의 조사 및 교육 과정을 거친 뒤에도 신분증 발급이 미뤄진 데에는 그의 탈북 동기가 불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불행한 결혼 생활에 대해 마저 털어놓고, 담당 조사관과 함께 병원을 찾아 검사와 상담을 거친 뒤에야 그는 비로소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 “남쪽과 달리 북쪽 사회에는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일반 병사가 10년, 특수 병사는 13년을 군에 복무하는 동안 휴가는커녕 단 한번도 외출이나 면회를 나갈 수 없기 때문에 군대 안에서 남자들끼리 부둥켜안고 입을 맞추는 등의 일은 매우 흔합니다. 그렇지만 동성애 개념이나 그에 대한 문제의식은 전혀 없어요. 바깥 사회도 마찬가지구요.” 15일 오후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작가는 “의사 선생님한테 내 성 정체성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니까 솔직히 기뻤다”고 말했다. “평생 외롭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나와 같은 처지인 누군가와 같이할 수 있겠구나 싶었던 거죠.” 동성애자를 다룬 잡지 기사에서 필요한 정보를 얻은 그는 이태원을 찾았고 그곳에서 평생 꿈꾸어 오던 사랑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나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는지라, 영혼의 짝인 줄 알았던 이에게서 쓰라린 배신과 사기를 당하는 아픔도 겪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민 끝에 응한 해외 언론 인터뷰가 국내 언론에 인용 보도되면서 “의지와는 무관히 커밍아웃을 하게 된” 사건도 있었다. 책 말미에는 중국에 사는 사촌누이를 통해 북녘에 두고 온 가족에게 선물을 보내려다가 몽땅 압수당함은 물론, 자신의 탈북 때문에 남은 식구들이 오지로 추방당하는 등 고초를 겪다가 몇은 죽기까지 했다는 소식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이 책을 쓰는 동안 울기도 여러번 울었습니다. 그렇지만 먼저 떠난 혈육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써야 한다는 생각에 눈물을 삼키고 입술을 깨물며 썼어요. 앞으로도 민족의 아픔을 녹일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어요.” ‘탈북문학’으로서 <붉은 넥타이>만의 고유한 특성 중 하나는 1960, 70년대 북녘 사람들의 아기자기한 일상을 다룬 장면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남쪽 여성들에 비해서도 훨씬 힘겨운 북쪽 여성들 삶을 다룬 소설을 다음 작품으로 구상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피아노 치는 청소부’라는 제목으로, 청소부 출신 피아니스트가 통일음악회에 나갔다가 북녘 누이동생 및 조카와 상봉한다는 이야기가 그 다음 작품으로 기다리고 있다. 현재 국가인권위원회가 들어선 건물에서 청소 일을 하는 그는 “책이 많이 팔리면 지리산 뱀사골 같은 조용한 곳에 들어가 글만 쓰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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