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와 예수:
죽인 자와 죽임을 당한 자
조르조 아감벤 지음, 조효원 옮김
꾸리에·1만7000원 <빌라도와 예수>는 1995년부터 20년 동안 이어온 <호모 사케르> 연작을 올해 초 마감한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2013년 저작이다. 전작 <남겨진 시간>(2000)에서 사도 바울의 서한을 분석하며 신학적 사유를 펼친 아감벤은 이번 책에서도 빌라도를 통해 법과 종교의 수수께끼를 파헤친다. 아감벤은 예수의 재판을 마치 한편의 연극처럼 묘사한다. 빌라도는 “인류 역사의 핵심적인 계기”가 되는 이 장면의 심판관 노릇을 한다. 유대민족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이 예수가 메시아를 참칭했다며 고발한 것이다. 서구 문명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 재판은 5시간 동안 이어졌고, 빌라도는 번민한다. 예수의 결백을 알고도 주저하면서 “비겁하게 회피”했기 때문이다.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자 예수는 “나의 왕국은 이 세계의 것이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우문현답이 오가는 장면에서 재판석(베마)은 두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고 아감벤은 분석한다.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이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세속과 하늘, 판결과 구원은 철저하게 분리된다. 아감벤은 근대 이후 인류의 숙제가 된 ‘이원적 세계’의 대립과 ‘법적 판단’(크리시스)에 대해 강한 비판의식을 드러낸다. 판결문조차 없었던 이 어이없는 재판에 대해 아감벤은 “법적 질서에 대한 가장 강력한 이의제기”라고 설명한다. 법과 종교로 탄탄하게 구축된 것처럼 보이는 서구의 통치 전통은 사실 예수의 재판에서부터 이미 강력한 도전을 받아왔다는 것이다. 나아가 예수는 “믿지 않는 자들은 이미 판결받은 것이다. (…) 이것이 판결이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는 말로 이 세계의 법적 판단 범주를 아예 넘어서버린다. 이 책은 미학적이면서도 난관으로 가득 찬 아감벤의 저서답게 법적 정의, 진리, 구원의 문제를 통째로 뒤흔든다. 무엇보다 ‘지금 여기’의 통치 질서가 과연 정당한지, 누가 누구를 ‘죄인’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인지 토대부터 질문하고 있다. 법과 정치가 다수를 잠재적 ‘호모 사케르’로 만들듯이 특정인의 혐의를 왜곡해 신고한 자, 그의 무고함을 알면서도 적들에게 내어준 자, 죽임을 방관한 자 모두 빌라도나 산헤드린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도 읽힌다. ‘죽인 자’와 ‘죽임을 당한 자’의 진실을 호도하는 속세의 판결은 여전히 거듭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아감벤은 이 책을 <호모 사케르> 연작에 포함시키지 않았지만, 그 연장선에서 쓴 책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밖에도 올해는 국내에 아감벤의 저서가 다수 나올 것으로 보인다. <말할 수 없는 소녀>(2014)와 <극단의 청렴>(가제, 2013)을 꾸리에가 준비중이며 <호모 사케르> 연작 2부 4권 <왕국과 영광>(가제, 2007), 2부 5권 <오푸스 데이>(2012), 2부 2권 <스타시스>(2015)를 새물결이 출간할 예정이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죽인 자와 죽임을 당한 자
조르조 아감벤 지음, 조효원 옮김
꾸리에·1만7000원 <빌라도와 예수>는 1995년부터 20년 동안 이어온 <호모 사케르> 연작을 올해 초 마감한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2013년 저작이다. 전작 <남겨진 시간>(2000)에서 사도 바울의 서한을 분석하며 신학적 사유를 펼친 아감벤은 이번 책에서도 빌라도를 통해 법과 종교의 수수께끼를 파헤친다. 아감벤은 예수의 재판을 마치 한편의 연극처럼 묘사한다. 빌라도는 “인류 역사의 핵심적인 계기”가 되는 이 장면의 심판관 노릇을 한다. 유대민족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이 예수가 메시아를 참칭했다며 고발한 것이다. 서구 문명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 재판은 5시간 동안 이어졌고, 빌라도는 번민한다. 예수의 결백을 알고도 주저하면서 “비겁하게 회피”했기 때문이다.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자 예수는 “나의 왕국은 이 세계의 것이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우문현답이 오가는 장면에서 재판석(베마)은 두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고 아감벤은 분석한다.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이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세속과 하늘, 판결과 구원은 철저하게 분리된다. 아감벤은 근대 이후 인류의 숙제가 된 ‘이원적 세계’의 대립과 ‘법적 판단’(크리시스)에 대해 강한 비판의식을 드러낸다. 판결문조차 없었던 이 어이없는 재판에 대해 아감벤은 “법적 질서에 대한 가장 강력한 이의제기”라고 설명한다. 법과 종교로 탄탄하게 구축된 것처럼 보이는 서구의 통치 전통은 사실 예수의 재판에서부터 이미 강력한 도전을 받아왔다는 것이다. 나아가 예수는 “믿지 않는 자들은 이미 판결받은 것이다. (…) 이것이 판결이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는 말로 이 세계의 법적 판단 범주를 아예 넘어서버린다. 이 책은 미학적이면서도 난관으로 가득 찬 아감벤의 저서답게 법적 정의, 진리, 구원의 문제를 통째로 뒤흔든다. 무엇보다 ‘지금 여기’의 통치 질서가 과연 정당한지, 누가 누구를 ‘죄인’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인지 토대부터 질문하고 있다. 법과 정치가 다수를 잠재적 ‘호모 사케르’로 만들듯이 특정인의 혐의를 왜곡해 신고한 자, 그의 무고함을 알면서도 적들에게 내어준 자, 죽임을 방관한 자 모두 빌라도나 산헤드린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도 읽힌다. ‘죽인 자’와 ‘죽임을 당한 자’의 진실을 호도하는 속세의 판결은 여전히 거듭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아감벤은 이 책을 <호모 사케르> 연작에 포함시키지 않았지만, 그 연장선에서 쓴 책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밖에도 올해는 국내에 아감벤의 저서가 다수 나올 것으로 보인다. <말할 수 없는 소녀>(2014)와 <극단의 청렴>(가제, 2013)을 꾸리에가 준비중이며 <호모 사케르> 연작 2부 4권 <왕국과 영광>(가제, 2007), 2부 5권 <오푸스 데이>(2012), 2부 2권 <스타시스>(2015)를 새물결이 출간할 예정이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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