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 열두 사람의 하루를 점묘한 연작 소설집 <크리
에이터>를 낸 작가 이신조. “역사소설도 아니고 전기도
아닌 새로운 장르에 대한 욕심이 예술가들의 하루를 가
상하는 이런 형식의 소설로 이어졌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이신조 연작소설 ‘크리에이터’
김수영, 마이클 잭슨, 호퍼…
생활과 예술의 길항과 조화 그려
김수영, 마이클 잭슨, 호퍼…
생활과 예술의 길항과 조화 그려
이신조 지음/문학과지성사·1만2000원 이신조의 연작장편 <크리에이터>는 발상이 독특하다. 작가는 자신이 고른 예술가 열두 사람의 하루를 점묘해 독자에게 제시한다. 수십년 생애의 단 하루일 뿐이지만 그 하루는 해당 예술가의 실존적·미학적 고민이 응축된 절단면으로 돋을새김된다. 스물넷 젊은 나이에 등단해 어느덧 18년차 ‘중견’에 이른 작가는 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술가들의 삶을 그리면서 예술가이자 생활인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돌아보고 각오를 다졌을 것이다. 책에 포함된 열두 예술가 사이에 이렇다 할 공통점은 없다.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 가수 마이클 잭슨, 홀로코스트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 화가 수잔 발라동, 시인 김수영, 영화감독 레오 카락스, 예술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 들을 하나로 묶는 객관적 지표가 무엇일 수 있겠는가. 작가에 따르면 그들은 “작가가 되기 전이나 그 뒤에도 어떤 식으로든 내게 도움과 힌트를 준 인물들”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공통점 아래 <크리에이터>라는 집의 방 한칸씩을 차지하게 되었다. 같은 영어라도 예술가를 가리키는 흔한 말 ‘아티스트’ 대신 창작하는 사람을 뜻하는 ‘크리에이터’를 택한 까닭도 짐작할 만하다. 아티스트에 비해 크리에이터에서는 실제로 작품을 생산하는, 노동에 해당하는 과정이 강조되는 듯하다. 그러니까 여기 포함된 열두 예술가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과로서 예술과 예술가가 아니라 그 예술품을 제작하는 과정으로서 창작 그리고 그런 창작에 종사하는 예술가라는 노동자-생활인에 대해서이다.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1999년 12월 어느 하루를 그린 작품에서 오에는 삼십대 중반이지만 어린아이의 지능밖에 지니지 못한 서번트 증후군 아들의 한밤중 ‘배변 행사’ 뒤처리를 마지막 일과로 삼는다. “자정쯤 화장실에 가는 아들이 배변을 마치고 제 방으로 돌아오면, 아들을 편안히 침대에 눕히고 아들의 머리를 반듯하게 베개로 받쳐주고 담요로 포근히 몸을 감싸주는 것, 감기가 걸리지 않도록 시트와 담요의 끝자락을 잘 여며주는 것,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일과였다.” 오에의 아들 히카리는 물론 <개인적 체험>을 비롯한 그의 여러 소설에 영감을 준 바 있지만, <크리에이터>의 작가가 주목한 것은 장애아 자식을 챙기는 ‘아버지’ 오에의 생활인적 면모다. 타고난 결함을 극복하고 작곡가로 거듭난 아들의 싸움은 오에 자신의 예술적 고투와 다르지 않다. “지난 36년간, 하루하루 순간순간 지켜본 아들의 삶은 어쩌면 아버지 자신의 글쓰기와 닮아 있다 할 수 있었다.” 인민군 의용군으로 징집되었다가 탈출한 김수영의 1950년 10월 어느 하루, 동료 홀로코스트 생존자 장 아메리의 자살 소식을 들은 프리모 레비의 1978년 10월의 하루, 천재에서 둔재로 몰락과 슬럼프를 거듭하던 레오 카락스의 2010년 1월 하루, 스승이자 폭군이었던 아버지 슬하에서 자신만의 음악을 꿈꾸던 열두살 소년 마이클 잭슨의 하루, 격렬한 부부싸움을 하고 집을 나와 밤샘 영업을 하는 간이식당에서 스케치를 하던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1942년 2월 어느 하루 등을 책에서 만날 수 있다. 시간과 장소는 다르지만 모두가 생활 또는 생존과 예술이 길항하는 가운데 양자의 조화와 화해를 위해 고투하는 하루들이다. 작가의 주관에서 출발한 기획이 독자의 공감을 획득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소년은 차가운 유리창 가까이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나만의 음악, 나만의 음악. 이내 흰빛이 소년에게 닿았다. 그러자 소년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소년은 이 사라짐의 기분 좋은 공포를 잘 알고 있었다. (…) 소년이 뜨겁게 사랑하는 것, 소년이 얼어붙듯 무서워하는 것, 그건 바로 음악이었다.” ‘하루’라는 시간대와 함께 열두 연작을 관류하는 공통 코드가 ‘흰빛’이다. 인용한 대목은 마이클 잭슨 편의 결말이지만, 나머지 연작에서도 예술가들은 예외 없이 “열망의 황홀한 덩어리 같은” 흰빛과 만난다. 주체가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강렬한 이 체험은 무형의 예술혼에 자신을 내주는 순간을 상징하며 그것은 곧 이 예술가 소설의 주제이기도 하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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