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독서
길, 저쪽
정찬 지음/창비·1만2000원 정찬은 역사와 폭력, 양심과 슬픔의 문제를 천착해 온 작가다. 그의 새 장편 역시 그 연장선에 놓인다. 2012년 말 대통령선거 결과에 대한 우울한 논평으로 문을 연 소설은 주인공들이 “눈부시게 푸른 청춘이었”던 1970년대 초로 독자를 데려간다. 화자인 윤성민과 그의 학교 선배이자 운동권 동료였던 김준일, 성민의 연인 강희우, 김준일을 흠모한 술집 여성 차혜림 등이 그들이다. 가시 철조망과 진흙 웅덩이로 이루어진 한국 현대사를 통과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어서, 준일은 90년대 중반 러시아에서 명을 달리했고 희우는 그보다 더 전에 성민의 곁을 떠났음을 독자는 소설 도입부에서 알게 된다. 성민이 준일과 함께 수배와 구속을 불사하며 운동에 매진하던 80년대 후반 어느 날 까닭 없이 사라졌던 희우가 27년 만에 편지를 보내 성민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고백한다. 말기 암에 걸린 희우와 재회하면서 성민은 자신과 희우의 청춘과 인생을 잡아먹은 역사의 악의적 농담을 확인하지만, 죽음을 앞둔 희우는 분노가 아닌 슬픔과 화해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분노를 껴안으면서, 분노를 넘어서는 감정이 슬픔이에요. 슬픔은 분노가 또다른 폭력으로 치닫지 않게 하는 고귀한 감정이지요.” 이것을 작가 정찬의 말로 받아들여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정찬 지음/창비·1만2000원 정찬은 역사와 폭력, 양심과 슬픔의 문제를 천착해 온 작가다. 그의 새 장편 역시 그 연장선에 놓인다. 2012년 말 대통령선거 결과에 대한 우울한 논평으로 문을 연 소설은 주인공들이 “눈부시게 푸른 청춘이었”던 1970년대 초로 독자를 데려간다. 화자인 윤성민과 그의 학교 선배이자 운동권 동료였던 김준일, 성민의 연인 강희우, 김준일을 흠모한 술집 여성 차혜림 등이 그들이다. 가시 철조망과 진흙 웅덩이로 이루어진 한국 현대사를 통과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어서, 준일은 90년대 중반 러시아에서 명을 달리했고 희우는 그보다 더 전에 성민의 곁을 떠났음을 독자는 소설 도입부에서 알게 된다. 성민이 준일과 함께 수배와 구속을 불사하며 운동에 매진하던 80년대 후반 어느 날 까닭 없이 사라졌던 희우가 27년 만에 편지를 보내 성민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고백한다. 말기 암에 걸린 희우와 재회하면서 성민은 자신과 희우의 청춘과 인생을 잡아먹은 역사의 악의적 농담을 확인하지만, 죽음을 앞둔 희우는 분노가 아닌 슬픔과 화해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분노를 껴안으면서, 분노를 넘어서는 감정이 슬픔이에요. 슬픔은 분노가 또다른 폭력으로 치닫지 않게 하는 고귀한 감정이지요.” 이것을 작가 정찬의 말로 받아들여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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