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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엉킨 핏줄 엉킨 인연

등록 2005-10-06 19:24수정 2005-10-07 15:16

송은일씨 장편 <한 꽃살문에 관한 전설>

장편을 주로 쓰는 작가 송은일(41)씨가 네 번째 장편소설 <한 꽃살문에 관한 전설>(랜덤하우스중앙)을 내놓았다.

주인공은 양귀비 꽃살문을 새기는 것으로 성가를 얻은 삼십대 후반의 목공예가 ‘이율희’와 그를 사랑하는 두 남자 ‘유태준’과 ‘최시형’이다. 율희와 태준은 말하자면 운명의 연인이고, 시형은 두 사람의 관계가 헐거워졌을 때 그 사이를 비집고 들었던, 연인 같은 친구라 할 법하다. 소설 첫 장은 태준의 시점으로 서술되며 다음 장은 시형의 시점, 그 다음 장은 율희의 시점으로 이어지며 다시 태준의 시점으로 차례대로 넘어간다.

율희가 새기는 꽃살문이 하필 양귀비라는 사실에 소설의 주제의식이 함축되어 있다. 한마디로 독을 품은 아름다움에 관한 소설인 것이다. 율희가 서양식 ‘팜 파탈’(=요부형 악녀)이라는 뜻은 아니다. 소설은 율희가 뿜어내는 독기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를 파고드는데, 그 탐색은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향하는 궤적을 그린다. 제목에 ‘전설’이 쓰인 연유다.

송은일 판 ‘전설의 고향’에서 율희의 모계와 태준의 부계는 혼외정사와 근친상간, 폭력과 죽음 같은 어둡고 일탈적인 관계로 얽혀 있다. 그 관계는 율희의 외할머니 달중이 할매에서부터 어머니 장진복을 거쳐 언니 연희와 율희 자신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태준 집안 남자들은 율희 집안 여자들을 법 테두리 바깥에서 사랑하거나(정언-달중이 할매), 한 핏줄임을 모르고 상피 붙거나(기환-장진복), 역시 한 핏줄임을 모르는 채 성폭행을 가해 결국 죽게 만들거나(기종-연희), 두 집안 사이의 숨겨진 관계를 모르고서 사랑하거나(태준-율희), 혹은 알면서도 사랑하거나(사준-율희) 한다. 부연 설명하자면, 장진복과 이연희는 아비의 성을 따르자면 사실은 유진복과 유연희가 되며, 기환과 기종은 이복형제이고, 태준과 사준은 그 이복형제의 아들들이다. 복잡하다.

텔레비전 드라마 <전설의 고향>이 즐겨 다루는 주제는 사랑과 배신, 원한과 복수의 관계일 것이다. 이 소설로 쓴 ‘전설’에서 근동의 세력가인 유씨 집안 남자들은 거침없고 이기적인 욕망의 소유자로, 율희네 집안 여자들은 그 욕망에 때로 호응하고 때로는 버팅기는, 하지만 호응하거나 버티거나 상처 입고 나자빠지기는 마찬가지인 하릴없는 피해자로 등장한다. 여자들이 사는 동네 ‘달아실’(월곡, 月谷)은 남성적 욕망과 폭력의 지배에서 자유롭다기보다는 그로부터 잠시나마 피신해서 치유받고 재활의 힘을 얻는 모성적 원리의 공간으로 그려진다.

평단에서 인정받고 오랫동안 헤어졌던 태준과도 재회한 율희는 달아실로 근거지를 옮기는데, 그곳에서 끔찍한 폭력을 당하는 한편 사준이라는 새로운 연인을 만나기도 한다. 폭력은 결국 태준의 아내가 청부한 것으로 밝혀지지만, 사준과의 관계는 이 ‘전설’이 좀체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또 다른 불씨라 할 수 있다. 둘의 관계를 용납하지 않는 사준의 아비 기종(=연희를 성폭행해서 죽게 만들고, 그를 따지려던 율희의 아비까지 사고로 위장해 죽인 극악무도한 인물)이 차량사고를 가장해 율희를 죽이려다가 제 아들 사준을 죽게 만드는가 하면, 고집스레 사준의 소생인 쌍둥이를 낳은 율희 역시 임신중독의 후유증으로 죽음을 맞고 만다.


주인공의 피와 유전을 비평의 중요한 요소로 삼았던 19세기 프랑스 문학사회학이 흥미로운 사례로 삼을 법한 소설이다. 박진감 넘치는 사건 전개에 추리적 기법, 세련된 문장으로 잘 읽힌다는 장점을 지니지만, 율희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지나치게 신비화한데다 다소 작위적인 이야기 구조가 거슬린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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