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복원기념 ‘맑은내 소설전’ 11권 완간
다리에 얽힌 옛 이야기·작가 체험등 풀어놔
다리에 얽힌 옛 이야기·작가 체험등 풀어놔
청계천 복원에 맞추어 기획된 소설 시리즈 ‘맑은내 소설선’ 전 11권이 완간되었다. 지난 7월 김별아씨의 <영영 이별 영이별>로 문을 연 ‘맑은내 소설선’은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서하진) <달콤한 죽음>(김용범)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이승우) <두물머리>(이수광)로 꾸준히 이어졌고, 최근 <칼>(박상우) <여자 이발사>(전성태) <청계천 민들레>(김용운) <모전교에는 물총새가 산다>(김용우) <유리의 노래>(이순원) <시간의 다리>(고은주)가 한꺼번에 출간됨으로써 마침표를 찍었다. 이 시리즈는 시인 전윤호씨가 기획하고 출판사 창해가 출간을 맡았다.
새롭게 나온 6권 가운데 전성태(36)씨의 <여자 이발사>는 청계천변에 흘러든 일본 여자 ‘에이코’를 주인공 삼아 해방 이후에도 한반도에 남은 ‘재한(在韓) 일본인 처’의 삶을 조명한 이색적인 소설이다. 일본인 처들은 가해국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박해에 시달리며 또 다른 피해자가 되었는데, 작가는 ‘가해국 출신 피해자’라는 모순된 정체성을 지닌 이들의 존재를 소설을 통해 복원하고자 한다.
청계천변 흘러든 일본여성의 삶
에이코가 조선 남자 ‘김태수’를 만난 것은 게이샤가 되기 위해 수련을 받던 1941년 공습 대피 훈련 도중이었다. 에이코는 태수를 필생의 남자로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를 위해 첫날밤의 의식을 치른다. 두 사람은 동거에 들어갔고 에이코는 태수의 아이를 수태했지만, 일본의 패전과 조선의 해방으로 두 사람은 현해탄을 건너야 할 처지가 된다. 자신이 조선에 처자식을 두고 온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숨겨 왔던 태수는 에이코를 데리고 여수에 도착한 직후 편지 한 장만을 남겨 놓고 사라져 버린다. 에이코는 조선에서부터 태수를 알던 사내 ‘이진식’의 도움으로 아들을 출산하며 그로부터 험난한 조선 살이가 시작된다.
소설은 경성의 고급 요정에서 사미센을 연주하는 게이샤로 일하던 에이코가 이진식의 근거지인 전라도 바닷가로 내려갔다가는 못 견디고 다시 청계천변에 이발관을 내어 비로소 정착하기까지를 좇는다. 그 과정에서 에이코는 태수와 재회하지만 그에게 아들 ‘정호’를 빼앗긴 채 내침당했다가는 전쟁의 혼란을 틈타 정호를 되찾아 오고,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가 사고로 다리를 다쳐 불구자가 된 정호가 성장해서는 결국 아버지를 찾아 제 품을 떠나는 곡절을 겪는다.
에이코는 태수의 여자로서 한반도에 왔지만, 태수에게 버림받은 뒤에는 진식과 동거하며 부부처럼 살게 된다. 징용되기 전에 갯벌 물막이 공사장에서 태수와 동료로서 일했던 인연 때문에 에이코를 돌보기 시작한 진식은 태수가 사라진 뒤 에이코를 상대로 미묘한 연정을 품기도 하지만, 그것은 한계가 뚜렷한 것이었다. 에이코의 마음이 한사코 태수를 떠나지 않는데다 진식 자신 에이코를 대하는 감정이 단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일제에 대한 증오와 에이코, 혹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환멸이 결코 한 자리에 놓일 수 없는 성질이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사실 일제에 대한 실감보다 그에게 더 현실적인 대상은 에이코라는 한 여자였으며, 그것은 훨씬 복잡한 감정을 몰아왔다. 애증에 가까운 그 감정에는 자신을 파괴하고 싶은 욕망도 놓여 있었다.”(184쪽)
태수의 마음이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고서부터 일본으로 돌아갈 기회만을 엿보던 에이코가 일본행을 최종적으로 포기하면서 하는 말은 “썩을녀르 조국…”(213쪽)이다. 파파 할머니가 되어 죽음을 코앞에 둔 그는 진식에게 저승에 관해 물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영감. 거그는 니뽄 여자 한국 여자 안 가리고 한 식구처럼 살던가요? 다들 동무처럼 이웃처럼 정겹게 살던가요?”(220쪽) 사랑을 찾아 온 땅에서 평생 증오와 냉대에 시달려야 했던 그에게 국적이니 민족이니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기보다는 괴물 같은 것이었으리라. 지난 5월 <국경을 넘는 일>이라는 소설집을 낸 바 있는 작가는 이번 책에서 또 한 번 ‘국경’을 넘는 시도를 한 셈이다.
단종·정순왕후가 이별한 영도교
청계천 다리를 소재로 한 ‘맑은내 소설선’ 소설들이 주로 역사소설의 방식을 택하는 데 비해 김용운(65)씨의 <청계천 민들레>는 왕십리 청계천변에서 태어나 자란 작가 자신의 체험을 담아 실감을 높인다. 소설의 주인공은 여섯 살짜리 소년 ‘철이.’ 그 아이가 또래 소년들과 어울려 청계천에서 물고기를 잡고 이웃집 소녀를 향해 어린 연정을 품기도 하며 소달구지에 실려 가는 참외를 몰래 빼내 먹는 서리를 하다 들키기도 하는 동안 바깥에서는 해방이 되고 전쟁이 벌어지고 다시 휴전이 되는 등 격랑이 휩쓸고 지나간다.
소설의 앞부분에서 철이의 할머니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생이별을 한 영도교, 일명 영미 다리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는데, 김별아씨의 <영영 이별 영이별>이 바로 그 사연을 소설화한 작품이었다. 김용운씨의 소설 속에서 영도교는 전쟁통에 좌익을 택한 철이의 사촌형 승준이 전세가 불리해지자 ‘저 둑길에 민들레꽃이 피면 돌아온다’는 약속을 남기고 북쪽으로 향한 다리이기도 하다. 청계천이 복원된 뒤인 현재 시점을 택한 소설의 마지막 장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서는 작가 자신으로 짐작되는 육십대 노인이 영도교 한가운데에서 마주친 소년과 몇 마디 말을 주고받다가는 “안녕히 계세요” “잘 가거라”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 노인과 소년이 나눈 대사는 반세기 가까운 시차를 두고 청계천의 복개와 복원을 두루 목격한 작가가 청계천에 얽힌 자신의 어린시절 추억에 보내는 작별의 인사라 해도 좋을 것이다.
한편 박상우씨의 <칼>은 매국노 이완용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결국 사형당하고 만 열혈남아 이재명의 거사를 그가 사용한 칼의 시점을 빌려 서술한 소설이다. 매국노를 죽이는 일에 제 목숨을 초개 같이 버리는 행위는 이재명과 동지들 사이에서 “사랑, 나를 죽여 남을 살리는 힘”(78쪽)으로 이해된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오랜 어둠에서 깨어나 다시 물이 흐르는 청계천변 둔치에 가을 꽃 구절초가 화사하게 피어 있다. 청계천 복원에 맞추어 기획된 ‘맑은내소설선’ 11권이 최근 완간되었다. 황석주 기자 stonepo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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