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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진실은 지루하고 거짓말은 아름답다!”

등록 2015-07-09 19:29수정 2015-07-10 10:15

장편소설 <거짓말>로 제20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작가 한은형. “내가 즐겁고 읽는 이도 즐겁게 하는 소설, 읽는 사람이 저마다 달리 읽을 수 있는 소설, 재미와 탄력을 갖춘 소설을 쓰고 싶다”고 8일 기자간담회에서 밝혔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장편소설 <거짓말>로 제20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작가 한은형. “내가 즐겁고 읽는 이도 즐겁게 하는 소설, 읽는 사람이 저마다 달리 읽을 수 있는 소설, 재미와 탄력을 갖춘 소설을 쓰고 싶다”고 8일 기자간담회에서 밝혔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고1 소녀의 당돌한 선언
한겨레문학상 수상 ‘거짓말’
자기애와 위악의 성장담
예민한 언어감각 돋보여
거짓말
한은형 지음/한겨레출판·1만3000원

거짓말을 좋아하는 소녀가 있다. 남을 속여서 이득을 얻거나 책임과 처벌을 모면하고자 함이 아니다. 진실보다 거짓말이 아름답고, 타인의 몰이해와 무례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미적 수준이 높은 사람”이라 자부하는 이 화가 어머니의 딸은 또래 아이들은 물론 선생님으로 대표되는 어른들조차 제 눈 아래에 두고는 한다.

제2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한은형 소설 <거짓말>은 당돌한 거짓말쟁이 소녀 하석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소설이 시작되면 1996년 현재 고교 1년생인 하석은 다니던 학교를 그만둔다. 같은 학교 남자아이와 교실에서 벌거벗은 채 커튼을 덮고 잠을 자다 들켰던 것. 그런 일이 왜 처벌받아야 할 잘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그는 전학 간 학교에서도 또 다른 말썽을 일으킨다. 봉지 라면 대신 개교 기념품인 도자기 연필통에 라면을 익혀 먹거나 출입 금지 구역인 층간 계단참에 몰래 들어가는 등의 일들이다.

“그냥 싫었다. 교과서의 문장들은 지루했고, 그림을 보고 있으면 하품이 나왔다. 정말이지 지루했다, 견딜 수 없이. 교과서를 보고 있으면 울렁거렸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가 거의 유일하게 관심을 지닌 것이 자살이다. 세살 때 첫 자살 시도를 했노라 주장하는 이 아이는 자신의 컴퓨터에 ‘자살 수집가’라는 폴더를 만들어 놓고 여러가지 자살 방식을 연구한다. 물론 언젠가, 가능한 한 이른 시일 안에 몸소 실행에 옮기겠다는 생각에서다. 경제적으로 유복한데다 나이가 많은 부모는 방임적이다 싶을 정도로 아이의 의사를 존중한다.

버릇없는 늦둥이 외동딸의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던 소설은 전체의 3분의 1에 가까운 100쪽을 넘긴 뒤 ‘죽은 언니’ 이야기가 지나가는 말처럼 언급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이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정보라 할 언니 이야기가 이제야 등장하는 것도 놀랍지만, 다시 100쪽 가까이를 진행해서야 밝혀지는 엄청난 비밀은 하석이 알고 살아 온 세계의 근간을 뒤흔들 정도의 파괴력을 지닌다.

그 비밀을 까발리는 것은 일종의 스포일러에 해당하겠지만, 영특하고 효심 깊었던 언니가 스물한살 나이에 까닭을 알 수 없는 자살을 감행했고 그것이 남은 가족의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말은 할 수 있겠다. “내가 언니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즉 부모의 관심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은, 죽는 것이 유일했다. 언니보다 더 일찍”이라는 하석의 말은 그가 그토록 자살에 집착하는 까닭의 일부를 설명해 준다.

“1부터 100까지 죄다 더하면 얼마가 되느냐는 문제가 나왔을 때 나는 단번에 알았다 (…) 어렸을 때 나는 수학 영재였다”고 말하는 자기애 또는 “나로 말할 것 같으면 (…) 바름을 혐오했고, 곧은 건 내 취향과 거리가 멀었다”는 식의 위악은 하석을 ‘곤란한’ 캐릭터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비로소 초경을 한다는 설정은 그가 사실은 뇌만 비대한 조숙아일 수 있다는 암시로 읽힌다.

비록 1년이 채 못 되는 시간대에 걸쳐 있지만 소설 안에서 하석은 나름대로 성장을 한다. 그가 뒤늦게 초경을 겪고 내처 성 경험을 한다는 뜻에서만은 아니다. 기숙사 룸메이트가 “애초에 아줌마로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며 혐오했던 그가 평범하다 못해 속될 것으로 짐작되는 그 부모를 긍정하는 장면에서, 심장에 문제를 지니고 태어났지만 수술을 한 뒤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된 자신이 어린 심장병 환자와 그 부모 들의 희망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장면에서 독자는 하석의 성장을 목격한다. 소녀의 성장담인 이 소설은 또한 ‘죽은 언니’의 비밀로 거슬러 오르는 회귀의 서사이기도 하다.

호감과 비호감을 넘나드는 개성 만점 주인공과 함께 작가의 독특한 언어 감각 또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새침한 각선미”라는 ‘얄미운’ 표현을 보라. 왈츠를 두고 “세상으로부터 충분히 사랑받아 자신도 세상을 충분히 사랑한 사람이 만든 음악 같았다”고 쓰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와 키스를 가리켜 “창틀을 핥는 기분이었다”라고 할 때에도 독자는 이 작가가 언어에 유난히 예민한 촉수를 지녔음을 확인하게 된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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