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그림자의 정체는 생의 밑바닥에 가로놓인 공허

등록 2015-07-23 18:47

1995년 선보인 서용선의 <거리의 사람들>에서 사람들은 몰개성의 평면적 존재로 그림자와 다름없다. 그림자는 때로 섬뜩한 공포감으로 다가온다.
1995년 선보인 서용선의 <거리의 사람들>에서 사람들은 몰개성의 평면적 존재로 그림자와 다름없다. 그림자는 때로 섬뜩한 공포감으로 다가온다.
[백민석의 리플릿] (9) 공허라는 두렵고 낯선 그림자
일본 공포영화의 한 장면. 횡단보도가 여럿 얽혀 있는 대도심. 신호가 떨어지고 행인들이 일제히 길을 건너기 시작한다.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행인들과 한낮의 아스팔트, 그리고 그 위로 검은 그림자들이 뚜렷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멀리선 잿빛 마천루들이 스카이라인을 바싹 밀어붙이며 스크린을 메운다.

아마도 시미즈 다카시의 십여 년 전 영화에서 봤던 듯한데, 세월이 흘러 공포영화의 명장면이 되었는지 요즘은 할리우드의 영화에서도 오마주로 되풀이된다. 이 평범한 백주 도심 풍경을 오싹하게 만드는 것은, 행인들의 발뒤꿈치에 붙어 길게 늘어진 그림자들이다. 그림자의 주체인 행인은 제 갈 방향만 보느라 미처 자신의 뒤를 살필 여유가 없다. 행인들은 자기 뒤에 붙어 검은 물결처럼 일렁이는 그림자들의 행렬을 깨닫지 못한다.

도심 한가운데 검은 그림자들이 넘실대는 기이한 광경을 보는 것은 객석의 관객들이다. 관객들은 스크린을 장악한 검은 그림자들의 스펙터클 앞에서, 형용키 어려운 어떤 감정에 사로잡힌다. 평소에 흔히 보던 그림자가 어느 한순간 오싹한 존재가 되어 다가오는 어떤 감정.

프로이트는 1919년의 논문 ‘두려운 낯섦’에서 이러한 감정을 “공포감의 한 특이한 변종”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림자처럼 흔하고 낯익은 것이, 어떤 계기에 의해 “이상하게 불안감을 주고 공포감을 주는 것으로 변”할 때 느껴지는 감정이다. 이 “두려운 낯섦(Unheimliche)의 접두사 ‘un-’은 이 경우 억압의 표지”이다. 아스팔트 위로 그림자가 도드라지듯, 억압되었던 것이 불현듯 돌아올 때의 감정이라는 의미이다. 한편 스크린 속 주체는 자신에게 들러붙은 낯설고 두려운 것의 정체, 기의를 읽어내지 못한다. 기의는 그림자라는 기표 아래 억압되어 있다. 정체를 모르니, 떼어버리지도 못한다.

그런데 내겐 이 두려운 낯섦이란 감정이 낯설지 않다. 어디선가 이미 경험했던 것이다. 어디서일까.

1995년, 서미갤러리에서 있은 서용선의 전시. <거리의 사람들>의 배경도 앞선 공포영화의 장면처럼 도심의 거리다. 노란색 차선이 한편에 보이고 사각형의 그리드는 보도블록이다. 횡단보도는 아니지만 행인들은 일제히 한 방향을 향해 걷고 있다. 이 작품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느낌은 리플릿을 통해 봐도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다를 바가 없다.

<거리의 사람들>이 자아내는 공포영화와도 같은 감정은 우선 원근감과 부피감이 파괴된 이차원의 평면으로 구현된 세계에서 비롯된다. 보도블록이나 노면에 표시된 차선처럼 행인들 역시 평면이라는 정체성을 갖는다. 행인들은 개개의 개성은 무시되고 정형화된 캐리커처로 남는다. 이 왜곡된 세계에서 주체는 평면화됨으로써 물질화되고, 정형화됨으로써 획일화된다. 이때 주체는 몰개성의 평면적 존재라는 점에서, 그림자나 다름없게 된다.

공포영화 속 그림자는 왜 무서울까
프로이트가 말한 ‘두려운 낯섦’
그림자 사람들을 그린 서용선
죽음을 호출하는 뭉크의 그림자
결국 없음의 있음이 그림자의 정체

뭉크의 전시 리플릿.
뭉크의 전시 리플릿.
또한 주체는 그림자가 그런 것처럼 세계의 표면에 머물 뿐 결코 표면 아래, 세계의 근원까지 내려가려 하지 않는다. 부피도 깊이도 없는 그림자와도 같은 삶을 살게 된다. <거리의 사람들>에서 그림자가 생략된 까닭도 이미 주체가 그림자가 된 때문이 아닐까. 작가 서용선은 왜 세계를 납작하게 눌러놨을까. <시선의 정치>(학고재 펴냄)에서 정영목은 “왜곡된 양식 속에(서) (…) 인간의 부정적 실존이라는 이 시대의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시도였다고 해석한다.

서용선의 <거리의 사람들>이 주는 두려운 낯섦은 왜곡된 양식에만 그치지 않는다. 색채도 그러한데, “빨강, 파랑, 노랑의 강렬하고 과감한 색감의 터치(는) (…) 색조 자체만으로도 심리적, 상징적 효과를 발휘한다.” 그림자나 다름없이 비인간화된 주체에서, 이상하리만치 강렬한 생명력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색채 때문이다. 그림자에는 입이 없지만 관람자들은 색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두렵고도 낯선 느낌을 받는다. 색을 통해 주체들이 비명을, 고함을, 비언어적인 존재증명을 하는 것 같다.

그림자가 정말 비명을 지르고 있는 듯한 그림을 그린 작가는 에드바르 뭉크다. 그의 인물화에서 그림자는 때때로 배경 전체로 나타나거나, 뒤돌아서 멀찍이 사라져가는 다른 인물의 검은 옷을 통해 의인화되기도 한다. <절규>의 인물 뒤로 길게 굽이치는 검은 형상도 실은 강물이 아니라 그의 발끝에서 흘러나온 그림자, 색을 통해 형상화된 절규가 아닐까. 뭉크도 서용선처럼 종종 색채의 힘을 빌렸다. 도록이나 모니터로는 잘 알 수 없는 그의 색채 감각은 지난해 한가람미술관에서 있은 <에드바르드 뭉크>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말년에 그린 몇몇 초상화는 색채가 내지르는 신음과 비명의 향연처럼 보인다.

뭉크의 <사춘기>(1895) 속 그림자는 심지어 소녀를 덮칠듯 보인다.
뭉크의 <사춘기>(1895) 속 그림자는 심지어 소녀를 덮칠듯 보인다.
뭉크의 <사춘기>(1895)에서는 앳된 소녀가 침대에 걸터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침대 시트에도 소녀의 표정이나 몸짓에도 흐트러진 구석은 보이지 않는다. 상당히 마른 편인데, 정면을 항해 크게 떠진 두 눈이 인상적이다. 눈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건 그림자이다. 소녀의 상체보다 크게 확대된 그림자는 소녀를 비추는 빛이 그리 풍부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빛이 허약할 때 그림자는 더욱 과장된다. 허약한 빛이 소녀의 건강 상태를 암시한다면 짙은 그림자는 그에 대한 근심일 수도 있다. 뭉크의 작품에서 그림자가 의미하는 것은 뭘까. 그의 수기의 한 대목. “내 그림자가 두렵다. 불을 켜자 갑자기 내 그림자가 어마어마하게 커져서 벽의 절반을 덮고 결국 천장에 이른다. 스토브 위에 걸린 큰 거울 속에서 나를 발견한다. 유령 같은 내 얼굴을. 나는 죽은 자들을 데리고 살아간다. 어머니, 누나,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

뭉크의 진술을 읽다 보면 ‘그림자’, ‘유령 같은 내 얼굴’,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이 하나의 단락 안에서, 하나의 뉘앙스로 뒤엉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낱말들은 미끄러져서 그림자처럼 다음 낱말들 위로 드리워지고, 다시 첫 낱말, 주체인 ‘나’로 돌아간다. 어마어마하게 커진 그림자는 유령 같고, 자신의 얼굴은 죽은 자 같으며, 죽은 자들의 추억은 그림자처럼 그에게서 떠나갈 줄 모른다. 진술을 읽고나면 <사춘기> 속 소녀의 그림자가 어째서 꼭 살아있는 것처럼 벽에서 흘러내리고 꿈틀대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게 된다. 그림자는 소녀의 머리카락과 같은 빛깔, 같은 터치로 그려져 소녀로부터 흘러나온 생령처럼 보인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가장 강렬하게 두려운 낯섦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죽음, 시체, 죽은 자의 생환이나 귀신과 유령 등에 관련된 것이다.” 독일어 단어 ‘unheimlich’(운하임리히)는 ‘집과 같은’(heimlich)의 반의어로, 영어로는 언캐니(uncanny)라고도 옮겨진다. “운하임리히한 집은 우리가 흔히 귀신들린 집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집보다 훨씬 더 강력한 표현이다.”

<사춘기>에서 그림자는 자신이 소녀에서 비롯된 존재라는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듯, 캔버스의 오른편으로 비켜나 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조만간 소녀를 덮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품이 자아내는 기이한 불안감은 여기서 비롯된다. 익숙하고 편안한 집이 귀신들린 집이 되는 것처럼, 소녀도 정체 모를 그림자에 덧씌워질 순간이 가까이 온 것이다.

백민석 소설가
백민석 소설가
그림자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 뭉크 하면 어쩐지 떠오르는 키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약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밑창 없는 공허가 일체의 것의 밑바닥에 가로놓여 있다고 하면, 그렇다면 인생이란 절망 이외의 그 무엇일 것인가?” 그림자가 실체가 ‘없는’ 광학적 현상에 불과한 것처럼, 공허 역시 무엇인가 ‘없는’ 것을 뜻한다. 세상에 귀신이 있다고 믿기는 어렵고, 그 두렵고 낯선 그림자의 정체는 우리 인생의 밑바닥에 가로놓인 공허가 아닐까. 그 없음의 있음을 불현듯 깨달을 때 찾아오는 감정이 두려운 낯섦 아닐까.

백민석 소설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