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 출간 2주만에 1000부 소진
역자들 회의적이었지만 반응 뜨거워
혐오·비난 오가는 처벌 대상 ‘성’ 다뤄
주류에 맞선 전복적인 담론 경합
페미니스트들의 안티테제였던 그
자아와 직면해 ‘거대한 전환’ 이뤄
역자들 회의적이었지만 반응 뜨거워
혐오·비난 오가는 처벌 대상 ‘성’ 다뤄
주류에 맞선 전복적인 담론 경합
페미니스트들의 안티테제였던 그
자아와 직면해 ‘거대한 전환’ 이뤄
900여쪽에 달하는 두텁고 문제적인 학술서 <일탈: 게일 루빈 선집>(현실문화)이 출간 2주 만에 초판 1쇄 1000부를 소진하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 ▶ 관련 기사 : “성은 언제나 정치적이다” 저주받은 섹슈얼리티의 사면 )
<일탈>은 ‘성인류학의 선구자’ 게일 루빈의 유일한 단독 저서. 1949년생인 그는 스스로 사도마조히스트(S/M·에스엠) 레즈비언이라고 커밍아웃한 실천적 문화인류학자로서 포르노그래피를 옹호한다며 페미니스트들에게 ‘안티’로 낙인 찍히기도 했다. 이 때문에 루빈이 62살이던 2011년, 미국 듀크대학출판부가 비로소 출간한 그의 첫 책 또한 미국 사회에서 야박한 평가를 피할 수 없었다.
이처럼 내용이 급진적인 탓에 한국어판 판매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옮긴이들(신혜수·임옥희·조혜영·허윤)과 출판사는 국내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출간 뒤 곳곳에서 강연회와 포럼 문의가 쇄도했고, 책은 재쇄작업에 들어갔다.
좀비로 부활하거나 귀환하는 페미니즘
지난 18일 오후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연 라운드테이블 ‘일탈과 섹슈얼리티의 지평’은 그 열기를 실감할 수 있는 자리였다. 지난 15일부터 11월8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여는 <동아시아 페미니즘: 판타지아>전 부대행사로 현실문화연구, (사)여성문화이론연구소가 함께 기획한 이 행사에는 150여명의 청중이 몰려 빈 자리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패널로는 <일탈>의 공역자 조혜영 박사(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공역자 임옥희 교수(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서동진 교수(계원디자인예술대 융합예술학과), 김현미 교수(연세대 문화인류학과)가 참여했다. 참석자들은 그동안 저평가 되었던 루빈에 대한 한국 독자들의 큰 관심에 놀라면서도 지금 같은 ‘페미니즘의 시대’에 이 책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궁금해했다.
이날 사회자로 나선 조혜영 박사는 “페미니즘이 계속 있어왔지만 최근에는 ‘페미니즘의 귀환’이라고 할 정도로 주목을 받고 있다”며 “최근 미디어 중심으로 부상하는 페미니즘 담론을 보면 마치 1세대 페미니즘, 이분법적이거나 피해자-억압담론을 품은 페미니즘이 다시 귀환하는 것 같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임옥희 교수는 “(루빈, 섹슈얼리티, 페미니즘이) 좀비로 부활하는 느낌”이라며 “루빈이 이렇게 관심을 끌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루빈이 ‘여성 거래’를 쓰고난 뒤 “적어도 10명은 읽겠지”라고 하자 그의 친구들이 “적어도 50명은 읽을 것”이라고 대답했듯 출판사에 번역자들이 이 책의 한국어판을 출간해달라고 제안하면서도 반신반의했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300권밖에 안 팔릴 것 같지만 출판을 해주면 정말 좋겠다고 전했고, 출판사가 흔쾌히 응해준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라고 밝혔다. 이 책의 출간 동기에 대해서는 성 담론을 둘러싼 인식 전환과 논의의 계기를 만들고 싶었던 데 있다고 밝혔다.
“우리 사회는 성에 있어 급진적인 일군의 사람들이 있는 반면, 제도화된 페미니즘을 비롯해 성에 대해 상당히 퇴행적 현상을 보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온갖 일탈적인 성을 다루는 루빈이 성적으로 보수화되어가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성 담론의 전환을 알리는 축제의 폭죽이 되길 바란다.”
이어 그는 “이성애가 자연적 질서라는 가정은 근대 이전 거의 도전받아본 적이 없지만 그녀가 보기에 이성애는 강제적 장치를 통해 만들어낸 정치적 발명품”이라며 “성은 사회가 강제하는 제도적 장치라는 점에 주목해 루빈은 성적 패러다임의 ‘거대한 전환’을 모색한다”고 설명했다. “이성애정상성” 자체야말로 발명된 것이지 정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얘기다. 성적 위계질서의 최상위에 있는 단일하고 축복받은 섹슈얼리티(결혼 중심의 이성애적 성관계)를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을 ‘일탈’적인 것으로 보는 현실 속에서 루빈은 나머지 배제된 성적 변이를 일으킨 ‘종족’의 ‘하위문화’를 연구했던 것이다.
임 교수는 그러나 루빈의 급진적 제안과 정반대로 보수로 회귀하는 한국의 성담론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아동청소년보호법, 성매매방지법 등이 어떻게 억압적 장치로 동원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루빈은 중요한 질문을 던지도록 이끈다”며 “나혜석을 비롯한 한 세기 전 근대 초기 신여성들은 21세기를 사는 우리보다 훨씬 앞선 성 담론을 거침없이 드러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완전히 망각되었다”고 설명했다.
이에 “온갖 일탈적인 성을 다루는 루빈이 성적으로 보수화되어가는 한국사회에서 성담론의 전환을 알리는 축제의 폭죽이 될지, 폭탄이 될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성의 논의를 전개하는 데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그는 진단했다.
성적 위계의 하위엔 ‘대딸방’ 들어가는 중년 남성들이
서동진 교수는 1970~80년대 세계적 인기를 끌었던 장 미셸 자르의 음악(Jean Michel Jarre equinoxe, https://www.youtube.com/watch?v=fpWNimba344)을 틀어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곡은 ‘카타콤’(샌프란시스코의 성적해방구였던 게이 섹스 클럽)의 뮤직리스트에 대한 루빈의 글에 언급된 음악이라고 한다. 서 교수가 “카타콤의 뮤직리스트를 다룬 루빈의 글을 예전에 읽으며 그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며 “루빈 한국지부 임명장을 받은 건 아니지만 루빈의 적자인 것 같은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라고 말하자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이어 서 교수는 “게이커뮤니티 안에서 우리는 도덕적으로 떳떳하다, 한사람을 길게 낭만적으로 연애할 수 있는 착한 시민이다, 하는 게이 정상화담론이 유행하기도 했다”며 “어느 텔레비전 광고처럼 괜찮은 남자들은 다 여친이 있고 완벽한 남자들은 게이라는 터무니 없는 이야기나, 쿨하고 매너 좋고 몸 좋은 게이 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때 게이는 성애적 요소들이 제거돼있다”고 지적했다. “나중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보면 게이라는 항목에서 ‘최첨단 소비생활을 구가한 라이프스타일의 일종’이라고 돼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루빈이 밝힌 성적 위계질서에 대해서도 좀더 생각해볼 부분이 있다고 설명했다. “오늘날 글로벌한 파티를 즐기고 외국에 놀러가는 ‘잘난 게이’들보다 눈치 살피며 ‘대딸방’에 들어가는 중년 남성들이 우리 사회의 성적 하위문화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는 “루빈의 논의는 동시대적인 동시에, 그때와 달리 바뀐 부분이 있다”며 “성적 위계에 대해 다시 생각할 기회를 얻지 않으면 루빈은 정치적, 이론적으로 무효”라고 덧붙였다.
또 “성적인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면 온갖 도착자들이 나올 것이라 걱정할 텐데, 문제는 그것”이라며 “루빈은 모든 형태의 성적 쾌락을 달라는 게 아니라 ‘문화적 상수’로서 존재하는 성적 행동과 관련해 특정한 이들을 왜 ‘적’ ‘욕망’으로 치환하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성애자들의 공황을 성소수자들에게 뒤집어 씌워 적으로 간주하고 적대감을 쏟아붓는 상황, 전쟁처럼 의사소통이 안 되는 쟁점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는 난망할 뿐”이라고 서 교수는 덧붙였다.
자아에 직면하고 가장 솔직했던 페미니스트 인류학자
김현미 교수는 “루빈은 1971년 미시간대 인류학과에 들어가 1994년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24년의 시간이 걸렸다”며 “그가 게을러서였기 때문이 아니라 20년 동안 ‘성전쟁’이 벌어진 현장에서 가장 급진적 정치적 투쟁을 해왔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1971년 미국의 상황은 포르노, 인신매매를 둘러싸고 ‘담론 전쟁’이 벌어졌을 뿐만 아니라 퀴어그룹 안의 이른바 ‘변태적 성행위’를 하는 사람들과 ‘고상한 게이들’ 사이에서도 견해차가 극명했던 까닭이다.
이어 그는 “1960~70년대 섹스와 젠더의 구분은 혁명적이었고 당시 여성주의 인류학자가 태동할 수 있는 배경에는 ‘민족지적 사례’가 결정적 공헌을 했다”며 “생물학적 결정론이 주도적이던 상황에서 여성 인류학자들은 민족지적 사례를 통해 성차는 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젠더’ 개념을 확립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고 말했다. 이들의 연구는 생물학적으로 모성성은 타고난 것이며 여성은 생물학적 문제로 수학을 못한다는 등의 전통적인 인식과 고정관념을 해체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그러나 ‘젠더’에 대해서조차 루빈은 도전했다고 설명했다. 1975년 25살의 나이에 ‘섹스/젠더’ 시스템이라는 분석 개념을 만들어 생물학적 성차, 섹슈얼리티가 과연 젠더에 속박된 하위 실천인지에 대해 질문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여성이 어떻게 거래되고 섹슈얼리티가 통제되며 가족과 친족이 만들어지는지 루빈은 비판적으로 고찰했다”고 말했다.
그뒤 루빈이 스스로 사도마조히스트 레즈비언임을 선언하고, 소아성애적 성향이 있다고 커밍아웃하자마자 비판이 쏟아졌다. 루빈이 제기한 분석적인 논의가 물밑에 가라앉아버리고 그는 “주류 페미니스트들의 안티테제”로서 낙인찍혔다는 것이다. 루빈은 초대된 모든 큰 학술대회에서 반대시위가 벌어질 정도로 낙인효과가 컸기에 뛰어난 저작 또한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
김 교수는 이어 ‘하위문화연구’라는 명명체제 덕분에 ‘주류’는 그 연구가 기존의 위계를 전복하지 않는다고 믿고 안심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위문화 연구가 인식과 자원 재분배의 체계 자체를 흔들면서 투쟁을 도발한다면 루빈처럼 커다란 낙인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루빈은 가장 솔직했고 진정한 자아에 직면한 페미니스트 인류학자이며 사도마조히스트 페미니스트”라며 “그는 기존 페미니즘 담론과 경합하는 언어화가 무엇인지 고민하며 만들었므로 마녀가 돼 사냥을 당했다”고 설명했다. “정교한 의례로서 안전 지식과 예의를 갖춘 쾌락적 성적 실천을 하는 것과 이성애 사회에서 특권적 위치를 가진 남성이 무력을 이용해 함부로 여성이나 아이의 몸을 찬탈하고 억압주고 상처주는 것, 어떤 것이 더 변태적인가 사유해봐야 한다고 루빈은 설명한다”고 그는 말했다.
또 “게일 루빈이 지적한 것처럼, 성적 소수자와 성적 실천에 대해 가지는 과도한 관심에 견줘 정작 성정치는 여전히 저개발 상태”라며 “주류는 경제적 착취, 빈곤, 도시개발, 문화적 모욕 등 모든 문제의 원인을 은폐하기 위해 가장 센세이셔널한 소수자의 성적 실천을 활용한다”고 설명했다. 주류들은 “아무리 진부한 각본일지라도 특정한 감정의 조직화에 능수능란하며 도덕적 시민권을 옹호하기 위한 낡은 방식의 감정정치학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에 김 교수는 “백인 주류 이성애중심 국가주의 페미니스트, 사회정화주의자 엔지오, 정부기관들이 아주 단순한 과정된 단순함으로 무장한 성정치담론으로 협박을 해왔지만 아직 이들과 견줄만한 전장이 마련되지 못했다”며 “이 책을 읽으며 여러분들이 개입하고 자기재현의 민족지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으며 ‘일탈의 정치성’을 확인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사진 현실문화 제공
일탈 라운드 테이블. 사진 현실문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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