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집 <라면을 끓이며>를 낸 작가 김훈이 추석 연휴 다음날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포즈를 취했다. 경복궁 근처 북촌에서 태어난 그에게 세종문화회관 언저리는 어린 시절 놀이터였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김훈 산문집의 재구성
일상은 경건하고 진지한 것
유머 코드에 웃음 깨물기도
일상은 경건하고 진지한 것
유머 코드에 웃음 깨물기도
김훈 지음/문학동네·1만5000원 <라면을 끓이며>는 절판된 산문집 <밥벌이의 지겨움>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바다의 기별>에서 가려 뽑은 글들과 그 뒤에 쓴 글을 함께 묶은 책이다. 밥, 돈, 몸, 길, 글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실으면서 개별 산문의 제목도 간결하게 바꾸었다.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라파엘의 집’ ‘러브 호텔과 러브’처럼 화제가 됐던 글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 앞머리에 놓인 표제글 ‘라면을 끓이며’는 책 제목을 정하고서 그에 맞추어 새로 쓴 것이다. “스승 없이 혼자서, 수많은 실험과 실패를 거듭하며 배웠다”는 그만의 라면 조리법을 소개하는데,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라면의 사회학이라 할 긴 서설이 오히려 감칠맛이 있다. “라면이나 짜장면은 장복을 하게 되면 인이 박인다. 그 안쓰러운 것들을 한동안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지 않아도 공연히 먹고 싶어진다. 인은 혓바닥이 아니라 정서 위에 찍힌 문양과도 같다. 세상은 짜장면처럼 어둡고 퀴퀴하거나, 라면처럼 부박하리라는 체념의 편안함이 마음의 깊은 곳을 쓰다듬는다.” 다음 글 ‘광야를 달리는 말’은 아버지 김광주(1910~1973)에 대한 회고다. 김구 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귀국해 경향신문 기자로 근무했고 <비호> <정협지> 같은 무협지 작가로도 이름을 날린 아버지는 집안을 돌보는 데에는 소홀했던 모양. 두어달에 한번씩 집에 들어왔다가는 다음날이면 다시 집을 나가 한동안 소식이 끊기고는 하는 아버지에게 중학생 김훈이 말했단다. “아버지는 꼭 허클베리네 아버지 같아요.” 그 말에서 어린 아들의 힐난조를 읽은 아버지가 대꾸한다. “광야를 달리는 말이 마구간을 돌아볼 수 있겠느냐?” 밥벌이의 지겨움에 치를 떨면서도 가장의 의무를 엄숙하게 강조하는 김훈의 산문들에서 장난기 섞인 유머를 발견하는 일은 즐겁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대통령이나 외국 원수의 행차에 환영 인파로 동원된 학생들이 “빈 거리에 개가 지나갈 때 함성을 지르며 국기를 흔들”다가 선생님께 혼났다는 삽화를 만날 때, “사내의 한 생애가 무엇인고 하니, 일언이폐지해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다”라고 시작한 아들에 대한 훈계를 “그러니 돈을 벌어라. 벌어서 나한테 달라는 말이 아니다. 네가 다 써라. 난 나대로 벌겠다”로 마무리할 때 독자는 킥킥 웃음을 깨물게 된다. 원고료로 받은 수표를 부인 몰래 책갈피 속에 감추었다가 찾지 못해서 이 책 저 책을 들춰 보는 장면은 어떤가. “수표를 찾으려고 <장자>를 펼쳐보니, ‘슬프다, 사람의 삶이란 이다지도 아둔한 것인가! 외물에 얽혀 마음과 다투는구나’라고 적혀 있어 수표 찾기를 단념할까 했으나 또 그다음 페이지에 ‘무릇 감추어진 것치고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내 언젠가는 기어이 이 수표 두 장을 찾아내고야 말 터이다.” 책에는 ‘여자’를 제목 삼은 글이 일곱편이나 실려 있다. 립스틱과 화장, 가슴의 모양, 미인대회 심사기준, 여자 가수들의 목소리 등을 두루 다루는데, 그 가운데 탱크톱을 예찬한 ‘여자 4’의 말미는 이러하다. “젊은 여자들의 성적 매력은 나라의 힘이고 겨레의 기쁨이다. 올여름 여자들의 노출이 너무 심하다고 텔레비전은 개탄하고 있지만, 너무 그러지들 말라. 곧 가을이 오면 여자들은 다시 옷을 입을 것이다. 좋은 것을 좀 내버려두라는 말이다.”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나는 놀기를 좋아하고 일하기를 싫어한다”라면서도 밥을 벌기 위한 일을 멈출 수 없었던 가장 김훈. 진부한 일상의 경건함을 힘주어 말하는 대목에서 “가부장의 아들로 태어난 가부장” 김훈의 진면목은 끝끝내 의연하다. “진부하게, 꾸역꾸역 이어지는 이 삶의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그 진부한 일상성 속에 자지러지는 행복이나 기쁨이 없다 하더라도, 이 거듭되는 순환과 반복은 얼마나 진지한 것인가. 나는 이 무사한 하루하루의 순환이 죽는 날까지 계속되기를 바랐고, 그것을 내 모든 행복으로 삼기로 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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