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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화성’에 뚝 떨어져도 적응해나간 사람들

등록 2005-10-13 17:35수정 2006-02-06 17:24

화성의 인류학자<br>
올리버 색스 지음. 이은선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1만3800원
화성의 인류학자
올리버 색스 지음. 이은선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1만3800원
사고로 색맹이 된 화가
50년만에 눈뜬 시각장애인
뇌손상 환자 7명의 삶을
의사가운 벗고 함께 겪었다
어느날 교통사고로 뇌 일부를 다쳐 전색맹이 된 화가 조너선 아이. 깊은 잠에서 깨어난 화가의 두 눈에 비친 세상은 완전히 낯설었다. 식탁 위의 토마토 주스는 검은 색이었고 컬러 텔레비전의 영상은 뒤범벅이었다. 청명한 아침은 늘 안개 낀 듯 부옇게만 보였다. 게다가 색채감각을 모두 잃어버려 화가의 삶은 좌절 그 자체였다. 마치 화성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미국의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72·뉴욕대 교수)가 쓴 <화성의 인류학자>(바다출판사 펴냄)는 뇌신경 손상 환자들이 잃어버린 감각·기억 그리고 낯설게 다가온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내면 경험을 내밀하게 들여다본다. 뇌손상 환자들이 체험하는 기이한 세계를 다룬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라는 책 등으로 이미 유명세를 탄 지은이가 이번엔 이에 더해 ‘화성 세계’에 사는 뇌신경 손상 환자 일곱 명이 달라진 경험에 적응하며 자기만의 세계를 개척하는 모습을 집중 조명했다.

전색맹이 된 화가 외에 1960년대 기억에 머무는 영원한 히피 청년 그레그, 갑작스런 충동과 기이한 행동을 보이는 투렛증후군 외과의사 베넷, 시각장애인으로 살다 45년만에 앞을 보게 된 50대 남자 버즐, 옛 기억에만 사로잡혀 사는 화가 프랑코, 그리고 그림에 천부적 재능을 보이는 자폐증 환자 소년 스티븐, 심각한 자폐증 판정을 받았던 동물학자이자 공학자 템플이 이 이야기의 일곱 주인공들이다.

지은이는 의사 가운을 벗고, 병원 진료실이 아니라 집과 직장 같은 일상의 삶터에서 환자와 친지들을 오랫동안 만나며 그들의 실제 삶을 관찰하고, 풍부한 임상사례와 철학·역사 자료들을 불러내어 환자들의 생생한 삶을 소설처럼 풀어나가며 성찰한다.

색스 교수의 논픽션 이야기에 담긴 메시지는 ‘인간의 놀라운 복원력과 적응력’이다. 자폐증, 기억상실, 전색맹, 투렛증후군 같은 뇌손상을 입었다 해도 “정체성은 단순하게 보존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으로 달라진 뇌와 ‘현실’에 적응하고 변화한다”고 그는 내내 강조한다.

전색맹 화가의 생활이 그렇다. 화가는 좌절과 혼란의 시간을 보낸 뒤 2년째부터 새로운 삶에 적응해갔다. 그는 화가로서 예전과는 다른 흑백의 예술세계를 창조했다. “그는 색명이 된 사실을 인정했고, 어느 정도 아쉬워하기는 했지만 색으로 얼룩지지 않은 순수한 세상을 ‘정제된’ 시각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특권’을 누리는 셈이라고 생각했다. 색에 가려져 일반인은 느낄 수 없는 미묘한 질감과 무늬가 그의 눈에는 아주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그는 호평받는 화가가 되었고, 전색맹을 치유할 수 있다는 의사의 뇌수술 권유를 거부했다.

지은이는 청력을 잃어 수화를 쓰게 되면 청각피질이 시각정보처리에 동원되며 대뇌의 구조가 크게 달라지는 것처럼 대뇌피질은 일부 부위가 상처를 입거나 마비를 일으키더라도 환자의 의지에 따라선 다른 대체 기능을 만들어내는 “유연한 조직”이라고 설명한다. 길 하나가 막히면 다른 새로운 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투렛증후군 외과의사 베넷. 그도 위험한 수술까지 해야 하는 외과의사이면서도 갑자기 몸을 실룩거리거나 기이한 행동의 충동과 강박증을 수시로 느끼지만 낯선 세계에 익숙하게 적응한 사례다. 베넷은 환자와 동료 의료진 사이에서 신뢰받는 의사였으며, 수술에 몰두할 때엔 어떤 리듬을 타며 행동하듯이 투렛 증상을 전혀 일으키지 않았다. 베넷의 집과 진료·수술실 그리고 베넷이 조종하는 비행기 안에서 색스 교수가 확연히 본 것은 인간 베넷의 자신감이었다. “강박증이 사라진다면 그건 내 삶이 아니죠.”


‘1천명 당 몇 명’ 식의 통계로 따져보아,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뇌 손상 환자들에게는 삶의 용기를 줄 만하고, 환자를 곁에서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그들이 체험하는 세계가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그들이 지금 어떻게 낯선 세계를 개척하고 있는 중인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만한 책이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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