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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작가 이문구가 들려주는 소설과 문장 이야기

등록 2015-10-15 20:29

독보적인 문장으로 일가를 이룬 이문구의 문학 관련 에세이를 한데 모은 산문 선집 <외람된 희망>이 나왔다. 사진은 2013년 2월 그의 10주기를 맞아 서울 연희문학창작촌에서 열린 ‘이문구를 생각하는 밤’ 행사에서 동료작가 황석영이 생전의 이문구를 회고하는 모습.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독보적인 문장으로 일가를 이룬 이문구의 문학 관련 에세이를 한데 모은 산문 선집 <외람된 희망>이 나왔다. 사진은 2013년 2월 그의 10주기를 맞아 서울 연희문학창작촌에서 열린 ‘이문구를 생각하는 밤’ 행사에서 동료작가 황석영이 생전의 이문구를 회고하는 모습.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이문구 문학 에세이 출간
빨갱이 자식에서 동리 제자로
소설 취재 위해 ‘마을방’ 열고
살림에서 우러나는 말들 챙겨
외람된 희망
이문구 지음/실천문학사·1만4000원

“나는 졸업할 때까지 선생의 강의과목은 고사(考査)를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학기말 고사 때마다 으레 내 습작 소설이 바로 출제 내용이었던 것이다. (…) 선생의 편애 정도가 그와 같았다. 그때에도 한 교실에서 배운 동기생들 가운데에는 나보다 월등 우수한 실력파 작가 예비군이 여럿이나 되었다. 조세희, 박상륭, 한승원 등등. 나로서는 지금도 민망함을 금치 못한다.”

작가 이문구(1941~2003)가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시절을 회고하는 이 글에 나오는 ‘선생’은 그의 스승인 김동리(1913~1995)다. 이문구가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소설가가 된 것은 물론 문학에 대한 관심과 재능이 뒷받침된 때문이지만, 여느 문학 지망생과는 다른 가슴 아픈 곡절이 또한 있다. 남로당 보령군 총책이었던 부친과 두 형이 전쟁통에 비명횡사한 뒤 그는 어떤 계기로 “문학가가 되면 (…) 난리통에도 최소한 명색 없는 개죽음만은 면할 수가 있겠구나” 하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기왕이면 우익 문단의 거목인 “김동리의 제자가 되는 것이 유리하겠다는 생각에” 동리가 교수로 있는 서라벌예대로 진학한 터였다.

“큰 나무 그늘에 들어서면 뙤약볕도 피하고 소나기도 피하고, 또 바람을 타게 되더라도 행여 덜 타게 될는지 모르는 것 아닌가. 아무리 빨갱이의 자식으로 자랐기로서니, 설마 한들 김동리가 가르친 제자까지 함부로 어떻게 하려고야 하겠는가.”

아닌 게 아니라 이문구는 스승 동리의 애정을 듬뿍 받으며 학교 생활을 마쳤고 동리의 추천으로 등단했으며 스승을 도와 잡지 <월간문학>을 편집하고 <한국문학>을 창간했다. 그가 동료 문인들과 함께 반독재 투쟁에 매진하며 정권에 밉보였던 1970, 80년대에 동리가 알게 모르게 그를 두둔하고 보호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이문구 문학 에세이’를 부제로 달고 나온 <외람된 희망>은 이문구의 산문 가운데 문학과 관련된 것들을 가려 뽑은 선집이다. 문학에 입문한 배경과 작가 경력, 소설과 문장에 관한 생각, 자신의 작품을 둘러싼 이야기가 두루 담겼다.

“이 무렵에도 목계(牧溪)는 하릴없는 장돌뱅이로 근기열읍(近畿列邑)을 돌아다니며 농무적(農舞的)인 소일이 사업이었고, 가끔가다 한번씩 그 노릇도 청승인 듯싶으면 처지가 당신과 비슷한 후진을 꾀송거려서, 알음알음으로 갈 만한 곳은 돈이 들고, 물음물음으로 갈 만한 곳은 먹을 게 없고 하니, 노는 데도 아니고 쉬는 데도 아닌 후미지고 안침진 구석쟁이로만 골라 다니며 따분함을 덜던 형편이어서,(…)”

‘목계’ 신경림 시인을 행수(行首) 삼아 김주영·조태일 등 동료 문인들과 어울려 다니던 70년대 중반을 그린 대목이다. 이문구 특유의 해학적이면서도 입에 착착 달라붙는 가락이 일품이다. 학창 시절 동리가 그의 문장을 편애했던 까닭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이문구가 경기도 화성 발안에 살면서 <우리 동네> 연작을 쓰던 무렵을 회고한 ‘우리 동네 시대’의 일부인데, 농촌에 살면서 피부에 와 닿는 농촌 문제를 소설로 쓰기로 한 그는 우선 한 달에 두 번 ‘마을방’을 열었다. 제 집 사랑방에 군불을 때고 화롯불도 피운 가운데 술과 음식을 준비해 놓고 마을 장정들을 불러 모은 것. 술상을 가운데 두고 자연스레 주고받는 이야기들이 <우리 동네> 연작을 위한 취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의 독보적인 문장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말에 관한 그의 생각을 들어 보자.

“작가의 말공부는 결국 사람이 살림하는 데서 우러나는 말들을 챙겨보는 일. 이리저리 휘둘려 사는 동안에 저도 모르게 잃거나 잊거나, 흘리고 놓쳐 버린 말들을 되찾는 일. 그렇게 되찾은 말을 자기의 글에 자주 써서 읽는 이들로 하여금 낯익게 하며, 그리하여 차츰 널리 쓰이게끔 터를 넓히어 나날이 늘어 가는 신조어·외래어·외국어에 밀려서 시나브로 은퇴하거나 실종하는 것을 혹은 막고, 혹은 늦추고, 혹은 그전보다 더 많이 쓰이도록 이바지하는 일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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