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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함께 견뎌온 세월이 더께로 얹혀 곰삭은 말, 당신

등록 2015-10-22 20:34수정 2015-10-23 11:15

22일 오후 서울 홍익대 앞 상상마당에서 기자들과 만난 박범신 작가는 “사랑했지만 많은 과오를 저질렀던 가까운 이들에 대한 회한의 마음을 <당신>에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22일 오후 서울 홍익대 앞 상상마당에서 기자들과 만난 박범신 작가는 “사랑했지만 많은 과오를 저질렀던 가까운 이들에 대한 회한의 마음을 <당신>에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박범신 칠순맞이 장편 ‘당신’
치매와 죽음 건너는 노부부
중단편전집 7권과 문학앨범도
22일 라디오 공개방송 열려
당신-꽃잎보다 붉던
박범신 지음/문학동네·1만4500원

무려 아홉이다. 올해 칠순을 맞은 작가 박범신이 자축 삼아 내놓은 책의 권수가 그렇다. 1973년 등단 이후 40년 남짓, 한 해 한 권꼴로 장편을 내놓고 틈틈이 중단편과 산문도 발표하며 바지런히 이어 온 작가의 행보가 새삼 뻐근하다. 어언 칠순이면 쉬어 갈 법도 하건만, 이 ‘영원한 청년 작가’는 그답게 일흔을 기념한다. 중단편전집 7권과 문학 앨범 <작가 이름, 박범신> 말고도 신작 장편 <당신-꽃잎보다 붉던>을 작품 목록에 보탠 것이다.

박범신 중단편전집
박범신 지음/문학동네·전 7권 전집 세트 9만6000원

작가 이름, 박범신
박범신 지음, 박상수 엮음/문학동네·1만4000원

언필칭 청년 작가가 <당신>에서 치매와 죽음 사이에 갇힌 노인을 등장시킨 것이 이채롭다. 물론 화제작 <은교>에서도 남자 주인공은 70대 노시인 이적요였다. 그러나 10대 소녀를 향한 노시인의 안타까운 열망을 다룬 이 소설에서 노년과 젊음은 절반 정도씩의 비중과 역할을 부여받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에 비해 <당신>에는 젊음이 들어설 틈이 없다. 이 소설에서 젊음은 회한의 그림자로서 부차적인 자리에 머무른다.

주인공은 일흔여덟 윤희옥과 일흔다섯 주호백 부부. 희옥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빨려들듯 매료되었고 평생을 두고 숭배하듯 떠받들어 온 호백은 6년 전 치매에 걸려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희옥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남자 김가인한테서 낳은 사생아 인혜를 제 딸 삼아 헌신적으로 키웠으며, 심지어는 정염에 들린 어미가 딸을 내팽개친 채 집 밖을 떠돌 때에도 흔들림 없이 아비와 어미의 구실을 겸했던 그였다. 호백이 뇌출혈로 쓰러진 뒤 희옥이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밝힌 대로 “그는 나의 충직한 시종으로 전 생애를 살아왔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일방적 관계에 변화를 초래한 것이 호백의 치매였다. 치매는 우선 헌신과 인내와 관용 아래 눌러놓았던 상처와 분노와 슬픔을 밖으로 끄집어낸다. 평생 희옥을 존대하며 조심스러워했던 호백은 치매 이후 희옥에게 욕설과 막말을 하고 수시로 심통을 부린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변화는 치매 초기 잠깐 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가 눈물을 떨구며 한 이런 말에서부터 왔다. “…나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그러니까 나를… 좀 도와주세요…”.

희옥은 바로 그 순간 “처음으로 그에 대한 사랑의 불꽃같은 발화를 보고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로부터 4년 남짓, 호백이 죽음을 맞기까지, 희옥은 평생 비대칭이었던 둘의 사랑에 최소한의 균형을 맞추고자 안간힘을 다한다. 그렇게 회한을 동반하고 늦게 찾아온 사랑을 대변하는 말이 바로 제목으로 쓰인 ‘당신’이다. 희옥은 호백이 자신만의 비밀의 정원이라 불렀던 다락방에서 몰래 써 두었던 일기에서 이 말을 발견하고서 이렇게 곱씹는다.

“당신, 이란 말이 왜 이리 슬플까. 함께 견뎌온 삶의 물집들이 세월과 함께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눈물겨운 낱말이다. 그늘과 양지, 한숨과 정염, 미움과 감미가 더께로 얹혀 곰삭으면 그렇다, 그것이 당신일 것이다.”

희옥이 사랑했던 남자 가인이 60년대 학생운동에 몸을 담갔다가 고문 끝에 폐인이 되어 삶을 일찍 마감했다든가, 판사를 거쳐 변호사가 되었던 호백이 5·18 유가족 변론을 맡았다가 공안검사가 된 친구의 협박으로 변론을 포기하고 결국 변호사 일을 접었다는 등의 설정은 두 사람의 사랑의 역사가 거쳐 온 세월의 거친 속살을 알게 한다. 청매화를 그토록 좋아함에도 치명적 알레르기 때문에 그 꽃에 가까이 갈 수 없었던 호백은 이렇게 혼잣말을 한다. “왜 사랑하는 것을 가까이 하는 게 때로 해가 될까?” 그것이 희옥과 자신의 관계를 빗댄 말임은 물론이다.

작가의 칠순과 <당신> 등 출간을 기념하는 한국방송 1라디오 공개방송 ‘이주향의 인문학 콘서트’가 22일 저녁 서울 홍익대 앞 상상마당에서 열렸다. <당신>의 부제 ‘꽃잎보다 붉던’의 출처이자 이 소설의 주제곡과도 같은 노래 <길 위에서>를 부른 최백호와 손병휘, 요조 등 가수들, 산악인 엄홍길, 소설가 이기호 등이 출연해 작가를 축하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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