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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는 간첩 아니라 북의 밀사…명예회복 원한다”

등록 2015-11-01 20:51수정 2015-11-02 21:48

황태성 손녀 황유경 씨
황태성 손녀 황유경 씨
[짬] 고국 찾은 황태성 손녀 황유경 씨
“1997년에 미국으로 갔어요. 내가 49살 때. 18년이 됐네요.”

1961년 5·16쿠데타 뒤 쿠데타 주역들을 만나려고 내려왔다가 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한 북의 거물급 ‘밀사’ 황태성(1906~1963)의 손녀 황유경(66)씨. 지난 29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황씨는 중키에 나이보다 젊어보이는 단정한 모습이었다.

“지난 5월에도 왔는데, 그게 18년만의 첫 (고국)방문이었어요.” 시댁쪽 산소와 친정 선산 등을 살펴보러 와서 20일 정도 머물렀다. 이번 두 번째 방문 목적은 “할아버지를 다룬 책(<박정희 장군, 꼭 나를 죽여야겠소> 김학민·이창훈 지음. 푸른역사) 출판기념회 참석” 등 겸사겸사다.

“그 동안 영주권도 없이 불법체류하다가, 결혼한 아이들 초청 형식으로 지난해에야 영주권을 받았습니다.” 그 전까지는 한국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거니와, 18년만의 방한에는 또 다른 기연도 있다. 책의 공저자인 김학민씨가 블로그에 황태성 사건에 대한 글을 올렸는데, 평소 외증조부와 가족사에 관심이 많던 황씨의 둘째 아들 김기현(41·미국서 식당 운영)씨가 우연히 그것을 보고 댓글을 단 게 인연이 돼 연결됐다. 그 덕에 책 내용도 풍부해졌고, 이번 방한도 이뤄지게 됐다.

“로스앤젤레스 남쪽 도시에 살고 있어요. 1997년 아이엠에프(IMF) 사태(외환위기) 때 남편의 사업이 어려움을 겪고 건강까지 나빠져 미국으로 갔어요. 우선 남편 건강부터 돌봐야겠다는 생각에.””

그 전까지 “유복하게” 살았다고 했다. 황씨는 1949년 대구 시국사건에서 공산주의자로 몰려 처형당한 아버지 황경옥(황태성의 두 아들 중 장남)의 유복자로 그해에 태어난 외동딸이다. 고모(황경임)와 작은아버지(황기옥)는 북으로 갔으며, 고모부(임종업)는 1950년 보도연맹 학살 희생자가 됐다. 남편과의 사별 뒤 재혼했음에도 예전 시아버지 황태성을 지극 정성으로 옥바라지 했던 어머니(이상열)도 1970년대 초 고혈압으로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그런 파란과 비운의 가족사를 떠올리며, 한국을 떠나고 싶어했던 건 아니냐고 묻자, “그건 아니에요. 지금도 나는 늘 한국에 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18년 전 남편과 함께 미국행
조부 다룬 책 출판 맞아 방한
중1때 서울 온 조부와 첫 만남

“면회때 늘 웃음 띤 인자한 분
북한서 받은 사명 진실 밝혀야
북은 왜 이리 조용한지도 궁금”

지금 그는 미국에서 옷가게를 하고 있다. 남편은 건강을 되찾았다. 아들 둘, 딸 하나를 뒀는데 모두 결혼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큰 감정은 없다”고 했다. “정치적 욕심 때문에 그랬을 텐데, 당시 상황에선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할아버지가 조금 빨리 내려오신 것 같습니다. 좀 뒤에 내려오셨더라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 텐데. 어렵게 대선을 치르고 대통령 취임식을 앞둔 상황에서 정치상황도 꼬이고 미국까지 난리를 치니까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원망스럽긴 하나, 그땐 내가 어렸고, 또 제 살기 바빠 지금까지 할아버지를 위해 한 일도 없는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요. 그저 죄송스럽고, 할아버지를 위해 애써주신 분들에게 고마울 따름입니다.”

1961년 8월 말에 서울에 온 황태성을 당시 13살의 동덕여중 1년생이던 황씨는 ‘할아버지의 친구’로 알고 처음 만났다. 중앙정보부 연행 뒤에야 친할아버지임을 알게 돼 자주 면회를 간 그는 황태성을 “하얀 머리에 늘 새하얀 한복을 입고 있던 굉장히 인자했던 분”으로 기억했다. 결핵을 앓아 폐 한쪽을 제거한 뒤 계속 약을 먹고 있었고 남파될 때도 안내자들 등에 엎혀 왔던 할아버지였으나 “신문에 난 사진처럼 그렇게 야위고 날카로운 인상이 아니라 늘 웃음을 띤 부드러운 표정”이었다고 했다.

황씨는 “할아버지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싶다”며 “그게 가장 큰 바람”이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간첩이 아니라 (남북의 평화통합 협상을 위한) 북의 밀사였다는 인정을 받아내고 싶어요. 더하지도 빼지도 말고 북에서 품고 왔던 사명을 사실 그대로 밝혀 재평가를 받게 하고 싶어요. 재심이라도 해서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그런 건 사실대로 밝혀야 하는 것 아닌가요.”

1963년 7월 육군고등군법회의의 파기환송심 판결문에서는 “피고인(황태성)의 남하는 남한에서 간 밀사에 대한 반례(답방)”라는 황태성의 진술이 확인된다. 실제로 5·16 직후 남쪽에서 먼저 서울과 평양에 상설대표부를 설치하고 통상·우편 관계를 회복하고 휴전선 자유통행을 보장하자는 등의 내용을 담은 편지를 소지한 밀사를 북에 보내 ‘정치회담’을 제의했다고 한다. 그때 남북이 서해 용매도 등에서 접촉을 했다는 사실이 1992년 평양 주재 소련대사관 정치담당관 바딤 트카첸코와 김종필씨 등의 증언으로 확인됐다.

또 그 판결문에는 황태성이 1962년 5월 북을 ‘괴집’(괴뢰집단)이라 표현한 탄원서를 제출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 그걸 근거로 그가 ‘전향’하려 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황씨는 “그럴 리 없다”고 했다. “변호인이 구명 차원에서 그런 표현을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아는 할아버지는 전혀 그럴 분이 아니었어요.”

황씨는 북에 있는 작은 아버지 황기옥(세브란스 의전과 평양의대를 나온 의사)과 1994년 85살에 돌아가신 것으로 알려진 고모 황경임의 가족을 만나보고 싶다는 소원도 갖고 있다. 미국 시민권이 있으면 북에 다녀올 수 있으나, 영주권으로는 안 된단다. “작은 아버지는 예전에 살아계시다는 소식만 들었어요. 지난 5월 방문 때 이상가족 상봉 신청을 했어요.” ‘선한 사람’이었던 의부는 할아버지 사건 때문에 다니던 경기도청 공무원직에서 쫓겨나 어렵게 살았다.

황씨는 북의 행태에도 불만을 표시했다. “왜 이리 조용한가요? 지금도 정말 궁금합니다.” 사건 당시 북이 파견 사실을 공개하고 남쪽과 적극적인 협상 자세를 보였다면 할아버지가 그렇게 희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북도 그 사건을 은폐하고 지워버렸다.

글·사진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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