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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황석영, 건축가 정기용을 불러내다

등록 2015-11-05 21:20수정 2015-11-06 10:41

소설 '해질 무렵'을 내고 2일 오후 일산 자택 근처에서 만난 황석영. “철도원 삼대 이야기를 오래 준비해 왔지만 지난 서사가 아니라 요즘 사는 이야기를 쓰기 위해 그 작품은 폐기하기로 했다”며 “내년 초쯤 유럽으로 건너가 쓰다 만 회고록도 완성하고 다음 소설도 쓸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명진 기자 <A href="mailto:littleprince@hani.co.kr">littleprince@hani.co.kr</A>
소설 '해질 무렵'을 내고 2일 오후 일산 자택 근처에서 만난 황석영. “철도원 삼대 이야기를 오래 준비해 왔지만 지난 서사가 아니라 요즘 사는 이야기를 쓰기 위해 그 작품은 폐기하기로 했다”며 “내년 초쯤 유럽으로 건너가 쓰다 만 회고록도 완성하고 다음 소설도 쓸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해질 무렵
황석영 지음
문학동네·1만1500원

“온 세상의 고향이 다 사라졌어요.”

“그거 다 느이들이 없애버렸잖아.”

황석영의 신작 소설 <해질 무렵>에서 선후배 건축가는 이런 대화를 나눈다. 작고한 건축가 정기용을 모델로 삼은 선배 김기영은 “어리석은 순진함”과 “사람과 세상을 짝사랑하는 태도”로 요약된다. 그런 그를 “관대함”을 지닌 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후배 박민우가 이 소설의 주인공. 경북 시골에서 상경한 서울 변두리 산동네 출신인 그는 타고난 두뇌와 의지로 운명을 개척하여 이른바 주류 사회에 드는 데 성공한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같은 산동네에 살던 고교 시절 연인 차순아로부터 연락이 오고 그 연락을 계기로 박민우는 자신이 빠져나온 가난했던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한다.

새 소설 ‘해질 무렵’
근대화 과정에 대한 성찰
당대 젊은이들 고투도 담겨

소설은 박민우를 일인칭으로 삼은 장과 스물아홉살 여성 정우희를 화자로 내세운 장이 갈마들면서 이어진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각자 진행되는데, 나이 든 박민우와 차순아를 다시 연결시켜 준 사람이 정우희라는 사실은 소설 중반 이후에 비로소 드러난다. 그런 정우희인즉 예술대학 출신 극작가 겸 연출가이지만 연극으로는 먹고살기 어려워 반지하방에 살며 편의점 심야 아르바이트를 한다.

“모든 것은 꿈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욕망의 꿈이 이어지다가 현실인 것처럼 실체가 나타나고 그것마저 꿈이 되어 흘러가버린다. 저 벌판에 띄엄띄엄 서 있던 시멘트와 철골로 이루어진 건물들은 예전과 달리 게임기 속의 가상세계 같다.”

건축가의 자기 부정처럼 들리는 이런 상념이 <해질 무렵>을 끌어 간다. 사회 각계의 유력 인사들과 교유하며 스카이라인을 바꾸고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온 건축가 박민우는 문득 회의감에 사로잡힌다. 김기영이 아프게 꼬집었다시피 자신이 한 것이 결국 ‘고향’을 없애 버리는 일이었다는 자각에 이른 것이다. 회한은 이 소설의 주조음을 이룬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지난 하루를 돌이켜보는 성찰의 시간이 해질 무렵 아니겠는가.

원고지 560장짜리 짧은 소설이지만 이 책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겼다. 산업화와 도시화, 계층 상승과 사회 양극화, 경제 발전의 그늘 같은 커다란 변화가 주인공들의 크고 작은 꿈과 좌절의 밑그림으로 깔린다. 특정 지역 출신들에 돈과 권력이 집중되는 지역주의 문제가 거론되는가 하면 젊은 예술가의 극도의 생계난, 전망과 의욕을 잃은 젊은이들의 동반 자살, 노인 고독사, ‘기러기 아빠’ 같은 사회 문제도 건드린다. 건축가인 박민우와 철거 용역 관리 일을 했던 차순아 아들 김민우처럼 서로를 전혀 몰랐던 두 사람이 사실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었다는 깨달음도 챙긴다.

“그는 과거를 향하여 앉아 있었고, 그의 과거가 나의 현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말미에서 차순아를 핑계 대고 박민우를 예전 산동네 자리로 불러낸 정우희는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밖을 내다보는 그를 지켜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이 소설에서 박민우의 현재를 묘사한 부분보다는 과거 이야기를 돌이킬 때가 한결 생동감이 넘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비유하자면 산동네 과거가 컬러 텔레비전이라면 현재는 오히려 흑백 텔레비전의 느낌을 준다.

“그곳에는 우리가 살았던 기억의 흔적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당신 부모님의 어묵가게, 우리 국숫집, 공동수돗가, 재명이 오빠네 구두터, 영화관, 육교 등등. 우리가 살았던 곳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 우리가 뭘 잘못한 걸까요. 왜 우리 애들을 이렇게 만든 걸까요.”

아들이 자살한 뒤 박민우를 향해 쓴 글을 차순아는 이렇게 마무리한다. 산동네가 사라진 일과 젊은 아들의 죽음이 무관하지 않다는, 소설의 주제로 이어지는 대목이다. 상심 끝에 역시 죽음을 맞은 차순아가 남긴 유산이 현관 밖 화분에 수북이 자란 강아지풀인 셈인데, 박민우네 집 마당에서도 잔디를 키우느라 뽑아내고는 했던 강아지풀은 그러니까 박민우가 버리고 도망쳐 나온 차순아와 산동네 사람들을 상징하는 장치다.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든다면 잔디를 흑백으로 처리하고 강아지풀만 컬러로 부각시켜도 좋을 듯싶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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