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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실정법과 정의 사이 ‘과거청산’의 길을 묻다

등록 2015-11-12 20:18

독일이 두 나라로 갈라져 있던 동서냉전 시대 베를린 장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려다 사살당한 동독인 희생자들의 묘비.  <한겨레> 자료사진
독일이 두 나라로 갈라져 있던 동서냉전 시대 베를린 장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려다 사살당한 동독인 희생자들의 묘비. <한겨레> 자료사진
헌법은 신뢰·법적안정성 중시
처벌 위한 ‘소급입법’ 금지
 
사법부도 “제3제국 부끄럽다”
나치 들추는 처벌에는 소극적
‘자리’ 욕심 서독 엘리트 위해
동독 과거 털어내기는 적극적

반유대인 집단범죄 기억 떨치고
동독 때 잘못 책임 물으려면
‘소급처벌’ 허용하는 개헌 해야
과거의 죄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권상희 옮김
시공사·1만3000원

정의만큼 매혹적인 말이 또 있을까.

“정의는 늦게 와도 어김없이 오는 것”이라는 솔론의 시구부터 “정의와 자유, 이 두 마디야말로 온 세계에 울려 퍼져야 할 나팔소리다”라는 조지 오웰의 글귀까지 정의에 바쳐진 헌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세상이 망해도 정의는 이루어지리라”(Fiat iustitia et pereat mundus)는 고대 로마의 격언은 지금도 법학의 세계로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는 세이레네스의 달콤한 노래다.

그러나 정의에 이르는 길은 주단 깔린 왕도가 아니다.

독일인 빅토르 카페시우스는 1944년 2월부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근무하며 유대인들을 두 그룹으로 분류해 ‘처리’했다. 노동이 가능한 사람은 수용소로 이송하고, 그렇지 못한 여자·어린아이·병자들은 가스실로 보냈다. 그가 내린 찰나의 결정들로 8천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들이 남긴 돈과 보석, 금니로 그는 치부책을 불렸다. 약학 박사였던 빅토르는 전쟁이 끝나자 괴핑겐에서 약국을 열고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로부터 근 20년 세월이 흐른 뒤 우여곡절 끝에 기소된 그는 살인 방조죄로 9년 징역형을 받았다. 살인죄는 검찰의 기소 단계에서조차 적용되지 않았다. 나치의 명령을 기계적으로 수행한 ‘도구’에 불과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정법상 흠결은 찾을 수 없다. 헌법인 독일 기본법은 “모든 행위는 그 행위 이전에 법률로 벌칙을 정한 경우에 한하여 처벌할 수 있다”(제103조 제2항)고 명시하고 있다. 법이 없으면 범죄도 형벌도 없다는 이 ‘소급효 금지’는 봉건적 절대 왕정의 자의적 법 집행에 맞선 체사레 베카리아 같은 계몽주의자들의 기본 명제였고, 숱한 희생을 치르고서야 근대 형법에 자리 잡은 일반 원칙이다. 그러니 빅토르 카페시우스 같은 자들을 처벌할 필요가 생겼다 해도 원칙은 불변이어야 했다. 그가 범죄를 저질렀던 나치 시대의 법으로도 범죄가 되는 것, 즉 살인죄 또는 살인방조죄만이 적용 가능한 처벌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을 정의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을 <과거의 죄>는 집요하게 반복한다. 유대 민족의 절멸을 목표로 저질러진 반인류적 범죄 행위의 하수인으로서, 8천여명을 죽음의 가스실에 몰아넣은 중죄인을 단순 범죄자와 같은 수준으로 처벌하는 것이 정의에 부합하는가? 그러나 반대 논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새로 법을 만들어 그 법 제정 이전의 행위를 처벌하도록 허용한다면, 그것은 헌법에 명시돼 있는 ‘소급효 금지’ 원칙을 어기고, 법체계에 대한 신뢰와 법적 안정성을 결정적으로 훼손하는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다. 정의의 딜레마다.

저자는 과거의 불법 행위를 법정에 세우는 형사소추는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범죄의 책임에 집단적으로 연루”돼 있는 만큼 그 기억이 현재를 계속해서 괴롭히지 않도록 하기 위한 과거 청산은 반드시 필요하다. “홀로코스트 범죄에 대한 형사소추를 주저하는 것은 유대인들에 대해 독일이 지은 죄의 일부분이다.”

실정법이 참기 어려울 정도로 정의에서 멀어져 있다면 그 효력을 인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라드브루흐 공식’을 처벌을 위한 근거로 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정법을 다루는 연방헌법재판소나 대법원이 이를 무턱대고 수용할 수는 없을 터이니, 소급효 금지 원칙을 중지시켜 형사소추를 가능케 하는 헌법 개정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그는 제안한다. 요컨대 정의를 위한 단죄라도 절차는 합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례도 있다. 연합군은 통치위원회법(제10조)을 통해 ‘소급효 금지’ 조항의 적용을 중지시킴으로써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의 길을 열었다.

1963년 이른바 ‘아우슈비츠 법정’에 기소된 전직 나치 친위대(SS) 대원 40여명을 비롯한 제3제국 부역자들이 프랑크푸르트 갈루스하우스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63년 이른바 ‘아우슈비츠 법정’에 기소된 전직 나치 친위대(SS) 대원 40여명을 비롯한 제3제국 부역자들이 프랑크푸르트 갈루스하우스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러나 독일 사법부는 “제3제국(나치)의 범죄에 대한 형사소추를 창피하고 다루기 어려운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고 뒷전으로 미뤘다. 빅토르 같은 사람들을 처벌한 ‘아우슈비츠 재판’은 1963년에야 가까스로 열렸다. 그랬던 사법부가 통독 이후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과거 청산에 보인 이상 열정은 “법치국가와 어울리지 않는”다. 예컨대 장벽을 지키다 탈주자를 사살한 동독 국경수비대원의 행위는 동독 탈출을 범죄 행위로 간주하면서 “총기 사용은 정당하다”고 한 국경수비대법에 따른 것이었으니 소급 입법은 물론 그 당시 실정법으로도 처벌이 불가하다.

그런데도 통일 독일의 사법부가 팔을 걷어붙이고 이 문제에 달려든 까닭을 저자는 ‘승자’인 서독 엘리트들이 ‘패자’인 동독 엘리트들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의도로 설명한다. 이처럼 ‘염불’ 대신 ‘젯밥’에만 한눈을 파느라 나치와 동독의 과거 청산을 가능하게 할 소급처벌 개헌 논의는 시도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생각하는 정의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셈이다.

왕년의 베스트셀러 <책 읽어주는 남자>(1995)의 저자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법률가 슐링크’는 낯설다. 그러나 1944년생인 그는 1987년부터 2006년까지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지냈고, 같은 기간 본대학과 프랑크푸르트대학, 훔볼트대학에서 법학을 가르쳤다. 그 사이 짧은 단행본 또는 학술지 등에 기고한 글 여덟 편을 모은 이 책은 법률서적이 아니라 에세이집에 가깝다. 그래서 같은 논지가 반복되기도 하고, 집필 연도에 따라 미묘한 입장 변화가 보이기도 한다. 독일 역사, 특히 흑역사를 잘 모르는 외국 독자가 읽기엔 약간의 불편이 따른다. 하지만 5·18특별법으로 위헌 논란을 정리하고 군사독재의 과거 범죄를 청산한 경험은 그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이 책의 마지막 장 ‘용서와 화해’는 근현대 대외사에서 베트남전을 제외하고는 줄곧 ‘피해자’였던 한국보다 ‘가해자’였던 일본 독자들에게 더 시사적인 글로 읽힌다. “(과거사와 관련해) 용서하지 않을 권리도 용서할 권리도 범죄자와의 관계에서 오직 피해자가 갖는 것이다. 진실과 화해를 지향하려면 우리는 진실을 화해의 전제로 삼아야 한다. … 용서, 판결, 망각, 화해-아픔을 끝내기 위한 이 모든 방법 중에 화해가 가장 많은 노력을 요하고 성공하기도 어렵다.”

강희철 기자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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