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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박정희 시대엔 가난하지만 평등했다?

등록 2015-11-19 21:20수정 2015-11-20 16:56

수출산업 지원에 자본 집중하려
내수 소비엔 강력한 억압 정책
엇비슷한 소비로 사회통합 효과

‘한국 현대 소매업의 역사’
이종현 가천대 교수 분석
박정희 시대 정부는 국민의 식생활에까지 강력한 소비억압 정책을 폈다. 1972년 6월8일 시민회관에서 열린 한국부인회 주최 ‘새마을 식생활 개선 실천대회’에서 주부들이 “쌀밥 편식은 가계를 좀먹는다”는 등의 구호가 적힌 주걱과 어깨띠를 두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국사진기자단 <보도사진연감>
박정희 시대 정부는 국민의 식생활에까지 강력한 소비억압 정책을 폈다. 1972년 6월8일 시민회관에서 열린 한국부인회 주최 ‘새마을 식생활 개선 실천대회’에서 주부들이 “쌀밥 편식은 가계를 좀먹는다”는 등의 구호가 적힌 주걱과 어깨띠를 두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국사진기자단 <보도사진연감>
결혼한다고 청첩장을 돌려선 안 된다. 화환을 받는 것도 진열을 하는 것도 금지대상이다. 하객들에게 밥 대접을 하거나 답례품을 나눠주는 건 마음만 먹고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하지 말도록 열거돼 있는 일을 굳이 실행에 옮긴 사람은 즉결심판에 넘겨져 5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유신 이듬해인 1973년 시행된 이른바 ‘새가정의례준칙’ 얘기다.

이젠 특급 호텔 억대 결혼식이 주변에서 흔한 일이 돼 버렸지만, ‘박정희 시대’에는 국가가 나서 이런 금기를 지정하고 강제했다. 전국 학교들에선 새 노래가 보급됐다. “쑥쑥 키가 큰다, 힘이 오른다/혼식 분식에 약한 몸 없다.” 이원수 작사·김동진 작곡 ‘즐거운 혼분식’을 부르며, 아이들은 담임 교사에게 점심 도시락 검사를 맡았다. 정부의 손길은 국민의 식단까지 미쳤다.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건 ‘소비 억제’ 또는 ‘소비 규제’에 해당한다. 경제 활동의 기본인 ‘생산-소비-생산’ 사이클이 돌아가려면 생산과 생산을 이어주는 소비가 필수다. 그래야 선순환이 일어난다. 앞의 생산보다 뒤의 생산을 크게 하려면 중간에 낀 소비가 활성화돼야 한다. 한데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은 국민의 활발한 소비 생활을 용납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 결과는 무엇이었나.

소비 또는 소비재 산업을 주로 연구해온 이종현 가천대 교수(경영학)는 얼마 전 네덜란드에서 먼저 펴낸 <한국 현대 소매업의 역사>(History of Korean Modern Retailing)에서 경제정책뿐 아니라 법적·행정적 제재로까지 강요되었던 박정희 시대의 ‘반(反) 소비’ 혹은 ‘소비 억압’을 분석하고 있다.

1970년대 한국은 소득 수준이 비슷했던 그 무렵 칠레나 멕시코, 우루과이, 콜롬비아 같은 남미 국가들에 비해 민간의 전체적인 소비(평균소비성향)가 뚜렷이 낮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정부가 국민의 소비를 억압하는 데 팔을 걷어붙였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의 정책적 목표는 가용 자원과 자본을 수출주도 제조업에 몰아주는 것이었다. ‘수출전선’에 차질을 초래할지 모를 소비에는 강력하고 집요한 통제가 가해졌다.

1973년 1월 반찬 종류를 줄여 선택의 여지를 없앤 이른바 ‘표준식단제’가 유신과업의 하나로 전면 실시돼 위반 업소는 단속과 제재를 받았다. 한국사진기자단 <보도사진연감>
1973년 1월 반찬 종류를 줄여 선택의 여지를 없앤 이른바 ‘표준식단제’가 유신과업의 하나로 전면 실시돼 위반 업소는 단속과 제재를 받았다. 한국사진기자단 <보도사진연감>
모든 상품에 10%의 일괄 세율을 매기는 부가가치세제가 수출·투자 촉진을 명분으로 도입됐다. 휘발유에 300%, 보석·모피류에 200%의 높은 세율을 부과하는 특별소비세가 실시된 것도 이 무렵이다. 고소득층의 소비 욕구에 족쇄가 채워졌다. 중산층 이상에서 사용이 늘고 있던 백화점 상품권은 소비 조장의 주범으로 몰려 1975년 전면 금지의 철퇴를 맞았다. 수입품, 특히 외국산 소비재의 수입은 ‘수입 감시제’, ‘수입 예시제’ 등으로 틀어막았다.

학교를 통해선 근검 절약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가르쳤고, ‘저축의 날’ 등 저금을 장려하는 캠페인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금단의 물건이 된 외래 소비품을 몰래 수입하거나 사용한 사람에겐 세무조사 등 단호한 ‘응징’이 뒤따랐다. 소매업을 비롯한 유통업종은 저축을 저해하고 소비를 선동하는 사악한 장사치들로 매도됐다. 소비를 자극할 물건은 아예 눈에 띄지 말아야 했다. 유통업 전반이 성장과 분화를 저지당한 사이 전통 재래시장은 유일한 소매 업태로 ‘수명’ 연장의 혜택을 누렸다. 소비재 유통업·소매업의 이런 미분화와 저발전은 “결국 정부의 소비 억압 정책에 따른 인위적 결과”인 것이다.

소비는 소득을 반영하면서, 눈에 가장 잘 띄고 남과 비교되는 부의 과시 수단일 수 있다. 70년대 수출을 통한 고도성장은 계급 분화와 소득·자산의 불평등화, 중·상층 계급의 구매력 향상, 내수 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소비를 악덕으로 모는 분위기는 고소득 계층조차 지출을 억제하도록 만들었고, 소득과 소비는 연결될 수 없었다. 많이 벌든 적게 벌든 다들 고만고만한 수준으로 먹고 입고 쓰는 ‘소비 평등’이 80년대 초반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러나 이 교수는 박정희 정부가 처음부터 이런 결과를 의도하거나 예견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정부의 목표는 분명했다. ‘수출만이 살길’이었기에 모든 자원과 자본은 수출 관련 제조업에 총동원되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이뤄진 소비억압은 정책의 목표가 아니라 파생된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그때는 다들 가난했지. 그래도 평등했잖아’라는 대중의 관념은 실제적 평등이 아니라 ‘인지된 평등’에 불과하며, 정부의 소비억압과 마찬가지로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고 이 교수는 주장한다.

그런 평등의식이 한편으론 70~80년대 고도성장이라는 경제적 성취를 가능하게 한 동력일 수 있다. 단순 강제 동원이라고만 봐서는 대중의 적극적인 참여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비억압은 사회통합과 체제 순응을 이끌어낸 중요한 기제로 작동했을 수 있다. 그러나 80년대 민주화와 계급 분화가 본격화하고, 외환위기 이후 소득 격차가 소비 격차로 이어지면서 ‘인지된 평등’ 의식도 해체 과정을 밟게 된다.

그럼에도 90년대 중반 이후 중·하위 계층이 더욱 큰 박탈감을 느끼는 이유,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남다른 평등의식의 근원이 어쩌면 박정희 시대의 강요된 ‘소비 평등’일지 모른다고 이 교수는 말한다.

강희철 기자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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