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산문집 <꾸들꾸들 물고기 씨, 어딜 가시나>를 낸 소설가 성석제. “청춘의 어느 순간, 공간은 솔푸드처럼 살아가는 내내 그때 그 시공으로 고개를 돌리게 만든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꾸들꾸들 물고기 씨…’ 출간
요절한 친우 기형도 추억담 등
추억 속 사람과 시공간 이야기
요절한 친우 기형도 추억담 등
추억 속 사람과 시공간 이야기
어딜 가시나
성석제 지음, 이민혜 그림
한겨레출판·1만4000원 본래 시로 출발한 성석제가 산문 작가로 변신한 것은 1994년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라는 책을 내면서다. ‘어처구니없다’라는 형용사로 주로 쓰는 말 ‘어처구니’의 명사형을 제목 삼은 이 책은 제목만큼이나 독특한, 시와 소설과 산문 그 어느 장르로도 규정하기 어려운 짧은 글들로 이루어졌다. 성석제의 새 책 <꾸들꾸들 물고기 씨, 어딜 가시나>는 그의 산문 데뷔작 못지 않게 인상적인 제목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키르기스스탄 여행담이 제목의 출처다.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에서 내 고향 방향으로 가다가 이식쿨 호수의 초입에서 만나는 도시가 발륵치다. 발륵치에서는 이식쿨 송어를 잡아 말리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대충 꾸들꾸들하게 마르면 찢어서 먹는데 담백하고 짭조름하고 질겨서 현지에서 파는 러시아 맥주 발티카 9와 함께할 안주로 제격이었다. 그 ‘꾸들꾸들 물고기 씨’한테서는 북어와 꽁치의 맛이 함께 나서 ‘북치’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책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성석제의 사이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한겨레>에 연재한 것들인데, ‘물고기 씨’에 이어지는 제목 후반부 ‘어딜 가시나’는 그 글들이 주로 여행담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신문 연재 당시의 제목 ‘사이’는 아마도 ‘인간’과 ‘시간’과 ‘공간’에 두루 나오는 ‘사이 간’(間) 자를 염두에 둔 작명이었을 게다. 책에 실린 마지막 글을 쓸 당시 25개쯤의 나라를 다녀 보았다는 작가의 여행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지난 시간들과 인연이 닿았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어우러지는 데에서 그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서른 살 이후 매년 3월 첫 번째 일요일은 안성에 있는 친우 기형도의 묘지를 찾아가는 날로 정해졌다. 벌써 스물다섯 번 다녀왔다. 그날 결혼한 걸로 치면 은혼식을 넘겼다.” 책의 첫 글은 요절한 시인 기형도에게 바쳐진다. 대학 신입생 시절 만나 같은 문학회에 든 두사람이 입학 이듬해인 1980년 봄날 국문과 교수였던 박두진 시인을 찾아간 이야기다. 기형도인즉 자신이 쓴 시들을 선생에게 보여 평을 듣고자 함이었지만, “스스로를 문학청년으로 여겨본 적이 없었다”는 그 친구는 술 한잔 마시지 못하는 기형도한테서 맥주 한 조끼를 사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면담에 동행한다. “바로 그날이 내 존재의 등짝에 문학의 화인(火印)이 찍힌 날로 정해졌다. 면전에서 절정 고수(=박두진)의 무심한 무시를 받으니 내상이 깊지 않을 수 없었다. 내상을 치료하는 데는 좋은 문학작품 같은 명약, 수련과 정양이 필요했다. 나 자신에게 자질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백지 같은 무지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샘이 많고 귀가 얇았다. 지루함과 반복을 한시도 견뎌내지 못했다.” 그 면담 이후 촉망 받는 시인이 된 기형도는 유고 시집 한 권을 남긴 채 서둘러 세상을 떴고, 성석제는 시인을 거쳐 소설가로 문학의 길을 꾸준히 걷고 있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아득한 내 생의 어느 한때, 나는 소풍을 갔다. 아름답고 정다운 여성들의 손을 번갈아 잡아가며 20리 길을 타박타박 걸어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기다리고 있는 공간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시간은 내 존재의 일부로 영원히 남아 있다.” 네댓 살 때쯤 어머니와 숙모, 셋째할머니와 함께 고향 근처 절에 소풍 가서 찍은 사진을 회고하는 이 글에는 시간과 공간과 인간이라는 세 ‘사이’가 다 들어 있다. “나 역시 어린 누군가에게 그런 순간을 선물하고 싶다”고 작가는 이어 썼는데, 독자들에게는 이 책 자체가 작가의 선물로 다가올 법하다. ‘에필로그’로 실린 문답형 글에서 ‘죽기 전에 한 번 더 가고 싶은 곳’을 묻는 질문에 대한 작가의 답은 파타고니아다. 까닭은? “그 삭막함, 천애의 무덤 같고 세상의 끝처럼 아무런 꾸밈 없고 가차 없고 무정한 느낌이 정말 좋았어요.” 세상의 일부이면서도 이 세상 같지 않은 그 풍경에 삶의 아이러니한 비밀이 담겼다는 것이 이 ‘사이 여행기’의 결론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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