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장편과 소설집을 한꺼번에 낸 신예 작가 김엄지. “이름은 안데르센 동화 속 엄지공주처럼 소중한 존재라는 뜻으로 엄마가 지어 준 본명”이라고 했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석사논문 쓰는 철학도 작가
신예 김엄지의 소설 두권
야성의 활력과 무가치의 공존
신예 김엄지의 소설 두권
야성의 활력과 무가치의 공존
김엄지 지음/민음사·1만2000원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김엄지 지음/문학과지성사·1만2000원 “첫 책이라 기쁘긴 하죠. 책도 예쁘게 나왔구요. 그런데 지금이 하필 논문 제출 학기라 정신 없이 바빠서 큰 감회를 느끼진 못하고 있어요. 글을 쓰는 것과 달리 책을 만드는 건 함께하는 작업이라는 생각 정도? 하하.” 2010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작가 김엄지(27)가 경장편 <주말, 출근, 산책: 어두움과 비>와 소설집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를 한꺼번에 내놓았다. 젊은 작가의 소설답게 개성 넘치는 제목과 시각적인 디자인이 눈에 들어오는데, 정작 작가는 기쁨을 만끽할 여유가 없어 보였다. 사르트르를 주제로 쓰는 석사논문 마무리로 한창 분주한 그를 3일 오후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대학에서 문예창작과 철학을 복수전공했고 철학 공부를 계속 하고 싶어서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제가 평소 그다지 논리적이지 못한데, 철학 공부를 하면 그런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을 것도 같아서요. 여건이 된다면 박사과정도 하고 싶어요.” 김엄지는 삼겹살 마니아인 젊은 여성 우라라를 주인공 삼은 등단작 ‘돼지우리’, 가난한 동네 도박장에서 ‘호구’ 노릇 하는 가장 영철이를 등장시킨 ‘삼뻑의 즐거움’ 같은 초기작에서 젊은 여성 작가답지 않은 야성의 활기를 내뿜으면서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소설집에 해설을 쓴 평론가 백지은이 말한 “엉뚱 발랄 귀여움”은 김엄지의 성격과 소설에 두루 해당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2014년 <세계의문학> 봄호에 전재한 경장편 <주말, 출근, 산책…>과 그 연작이라 할 ‘고산자로12길’ ‘느시’ 같은 단편은 그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선보인다.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을 알파벳 이니셜로 표기하고,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직장인들의 일상을 냉정하게 좇는 이 소설들에서 부각되는 것은 “‘무가치’ 그 자체인 세계” 또는 “악무한의 무의미”라는 “김엄지식 지옥”(평론가 김형중)이다. 다시 그러나, 김엄지 자신은 “반복이라는 사실을 묘사하고 싶었을 뿐 그것을 지옥으로 그릴 생각은 아니었다”고 선을 그었다. “프랙탈 구조처럼 비슷한 사람들이 사무실을 채우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 자체로는 비관할 것도 없고 그저 버티면서 살아 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 <주말, 출근, 산책…>에서 주인공 ‘이’(E)가 하는 일이라고는 동료들과 술자리에서 상사에 대한 험담을 나누고, 출퇴근길에 다리가 잘린 비둘기를 본 뒤로 수시로 발목 운동을 하며, 연락이 없는 여자친구에게 계속 연락을 시도해 보고, 아침이면 졸린 눈을 비비며 다시 출근길에 오르는 일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결국 출근하지 않기로 결심하기 직전, 소설 말미에 나오는 이런 문장은 그의 반복적이고 소모적인 일상을 구성하는 황폐한 이미지들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E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감았고, 전봇대와 쓰레기, 젖은 길, 빗물이 흐르는 단 하나의 방향, 비둘기, 갈색 개, 그 모든 것들이 더 명징하게 떠올랐다.” 두 단편 ‘고산자로12길’과 ‘느시’가 이 경장편과 일종의 연작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고산자로12길’의 주인공 E와 그의 직장 동료 에이(a), 비(b), 시(c)는 경장편의 해당 인물들과 동일인이라 해도 무방하고, 주인공이 ‘아르’(R)로 바뀐 ‘느시’에는 <주말, 출근, 산책…> 등의 주인공 E가 보조적 인물을 가리키는 소문자 이(e)로 바뀌어 등장하는 식이다. 그뿐이 아니다. 경장편에 나오는 문장 “낯익은 얼굴은 전혀 알 수 없는 얼굴이기도 했다”가 ‘고산자로12길’에 똑같이 나오고, 역시 경장편 속 “때때로 동료의 마음은 이해가 되기도 하는 것이었다”는 문장도 ‘고산자로12길’과 ‘느시’에 거의 동일하게 등장한다. 김엄지는 “요즘은 초기 단편의 활력과 최근작들의 상반된 분위기를 한데 아우르는 소설을 쓰고 있다”며 “사람 관계와 여행 등 경험을 더 풍부히 해서 더욱 깊이 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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