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
박흥수 지음/후마니타스·2만원 근대의 풍경은 우렁찬 기적 소리와 함께 열렸다. 시커멓고 거대한 증기기관차가 콧김을 내뿜으며 철도를 질주하는 장관은 인간의 물질문명에 대한 무한한 경외와 신뢰의 다른 말이었다. 기차를 탄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로 가는 설레임이었고, 새로운 산업의 탄생을 알리는 고고성이었다. 철도는 가난한 이주자들의 피땀이 밴 고역의 산물이자, 제국주의 침탈의 길을 닦는 첨병이기도 했다. 20년차 현직 기관사가 쓴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는 1825년 영국에서 기차가 최초로 승객을 싣고 시속 15km로 달린 이래 200년 가까이 철도가 세상을 어떻게 바꿔왔는지를 살펴본다. 지은이는 이 책을 기관차로 삼아, 철도가 빚어낸 근대 세계사의 시공간을 운행한다. 차창 밖 풍경의 해설은 전문 역사서 내지 사회과학 서적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 풍부하고 흥미롭다. 생생한 묘사 군데군데 적절한 유머 코드가 심어져 읽는 맛을 더한다. 역사상 딱 한 번 기차 경주대회가 열렸던 1829년 영국 리버풀-맨체스터 구간의 한 마을로 가보자. 19세기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와 사상가 카를 마를크스가 가상 중계방송을 한다. 마르크스: 리버풀은 영국 식민지 무역의 전진기지로 (…) 자본의 본원적 축적 과정이 담긴 도시입니다. 이 기관차들이 자본주의를 더욱 발전시킬 것입니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상품은 교환되어야 하는데요, 철도는 이 교환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보장할 것입니다. 디킨스: 앗, 말씀 드리는 순간 출발점을 떠난 기관차가 성난 코뿔소처럼 달려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저토록 거대한 쇳덩이가 달릴 수 있는지,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든 광경입니다. 철도는 표준시를 탄생시켰고, 모든 사람을 시간 앞에 한 줄로 세웠다. 다른 지역과의 시차에 상관 없이 약속된 시각에 운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선 철도 전문 변호사였던 링컨이 꿈꾼 대륙횡단철도가 남북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제7기병대의 활약으로 철도가 건설될수록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버팔로들은 무참히 몰살당했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일주일에 주파할 수 있게 된 미 대륙은 전혀 다른 신세계로 변모해갔다. 일본도 철도를 앞세워 한반도를 장악했다. 1936년, 식민지 청년 손기정과 남승룡은 도쿄에서 유럽행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베를린에 도착해 슬픈 마라톤을 뛰었다. 몇 년 뒤부터는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열차가 아우슈비츠 수용소 안으로 직행했다. 지은이는 “철도가 세계 곳곳의 적대적 갈등을 없애고 더 가난한 나라와 사람들에게 희망을 나르는 착한 거인이 되기를, (…) 그 출발점이 서울과 평양, 신의주를 잇는 노선이 되기를” 소망하며 종착역에 닿는다. 열차 탑승권 가격이 아깝지 않을 만큼 놀랍고 매력적인 책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박흥수 지음/후마니타스·2만원 근대의 풍경은 우렁찬 기적 소리와 함께 열렸다. 시커멓고 거대한 증기기관차가 콧김을 내뿜으며 철도를 질주하는 장관은 인간의 물질문명에 대한 무한한 경외와 신뢰의 다른 말이었다. 기차를 탄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로 가는 설레임이었고, 새로운 산업의 탄생을 알리는 고고성이었다. 철도는 가난한 이주자들의 피땀이 밴 고역의 산물이자, 제국주의 침탈의 길을 닦는 첨병이기도 했다. 20년차 현직 기관사가 쓴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는 1825년 영국에서 기차가 최초로 승객을 싣고 시속 15km로 달린 이래 200년 가까이 철도가 세상을 어떻게 바꿔왔는지를 살펴본다. 지은이는 이 책을 기관차로 삼아, 철도가 빚어낸 근대 세계사의 시공간을 운행한다. 차창 밖 풍경의 해설은 전문 역사서 내지 사회과학 서적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 풍부하고 흥미롭다. 생생한 묘사 군데군데 적절한 유머 코드가 심어져 읽는 맛을 더한다. 역사상 딱 한 번 기차 경주대회가 열렸던 1829년 영국 리버풀-맨체스터 구간의 한 마을로 가보자. 19세기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와 사상가 카를 마를크스가 가상 중계방송을 한다. 마르크스: 리버풀은 영국 식민지 무역의 전진기지로 (…) 자본의 본원적 축적 과정이 담긴 도시입니다. 이 기관차들이 자본주의를 더욱 발전시킬 것입니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상품은 교환되어야 하는데요, 철도는 이 교환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보장할 것입니다. 디킨스: 앗, 말씀 드리는 순간 출발점을 떠난 기관차가 성난 코뿔소처럼 달려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저토록 거대한 쇳덩이가 달릴 수 있는지,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든 광경입니다. 철도는 표준시를 탄생시켰고, 모든 사람을 시간 앞에 한 줄로 세웠다. 다른 지역과의 시차에 상관 없이 약속된 시각에 운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선 철도 전문 변호사였던 링컨이 꿈꾼 대륙횡단철도가 남북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제7기병대의 활약으로 철도가 건설될수록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버팔로들은 무참히 몰살당했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일주일에 주파할 수 있게 된 미 대륙은 전혀 다른 신세계로 변모해갔다. 일본도 철도를 앞세워 한반도를 장악했다. 1936년, 식민지 청년 손기정과 남승룡은 도쿄에서 유럽행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베를린에 도착해 슬픈 마라톤을 뛰었다. 몇 년 뒤부터는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열차가 아우슈비츠 수용소 안으로 직행했다. 지은이는 “철도가 세계 곳곳의 적대적 갈등을 없애고 더 가난한 나라와 사람들에게 희망을 나르는 착한 거인이 되기를, (…) 그 출발점이 서울과 평양, 신의주를 잇는 노선이 되기를” 소망하며 종착역에 닿는다. 열차 탑승권 가격이 아깝지 않을 만큼 놀랍고 매력적인 책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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