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홍규. <한겨레> 자료사진
손홍규 지음/창비·1만2000원 손홍규의 소설집 <그 남자의 가출>에는 아홉 단편이 묶였다. ‘아내의 발라드’ ‘아내를 위한 발라드’ ‘발라드의 기원’ 세편 그리고 표제작인 ‘그 남자의 가출기’와 ‘정읍에서 울다’는 각각 연작으로 읽힌다. 이 연작들과 또 다른 작품 ‘기억을 잃은 자들의 도시’ 등은 공통적으로 남편과 아내 사이의 버성긴 관계를 다룬다. 표제작의 주인공인 육십대 사내는 어느 날 문득 충동적으로 집을 나간다. “아내는 왜 살까. 내게 고통을 주기 위해”라는 문답을 혼자 주고받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내 쪽에 특별한 문제가 있다고는 하기 어렵다. 그보다는 “아내와 자신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늙어버린 것만 같았다”는 상념에서 보듯, 사소하게는 ‘성격 차이’ 거창하게 말하자면 실존적 고민이 이 시골 중늙은이의 출분을 부추겼음이다. 이 사내와 동일인으로 볼 수도 있을 ‘정읍에서 울다’의 주인공 ‘그’는 작은 질환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옆 침대의 늙은 환자 부부를 보며 이런 생각을 곱씹는다. “어쩌면 그들도 그와 아내처럼 서로를 의심하고 조롱하고 힐난하고 할퀴며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아내 쪽이든 남편 쪽이든 이렇다 할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다. 굳이 ‘범인’을 찾자면 세월이라는 괴물 또는 생로병사라는 존재의 숙명에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법적으로 유부녀가 된 여자들이 예외 없이 감염되어 죽음에 이르는 전염병이 창궐하는 상황을 설정한 ‘발라드’ 연작에서 아내들의 속절없는 죽음은 남편과 사이에 벌어진 지옥 같은 심연에 대한 상징이라 하겠다. ‘발라드’ 연작과 비슷하게, 모든 이들이 한꺼번에 기억을 잃는 에스에프적 상황을 설정한 ‘기억을 잃은 자들의 도시’에서 한순간 낯설어진 남편과 아내 사이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쪽이 제 남편이시군요.” “그럼 제 아내이신가요?” 아무리 오래도록 금슬 좋게 해로한 부부라 해도 부조리극을 닮은 이런 대사를 주고받을 법한 상황이 아예 없기야 하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결혼과 부부 관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마냥 암울하지만은 않다. ‘발라드’ 연작에서, 미구에 닥칠 죽음을 번연히 알면서도 혼인 신고를 강행하는 아내들 또는 거꾸로 혼인 사실을 감춘 채 안락사를 피해 아내를 꼭꼭 숨겨두는 남편들은 사랑의 투사들이라 할 수 있다. 한동안 집 밖을 떠돌다가 결국 늙은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다시 들어가기로 한 사내의 결단으로 마무리되는 표제작의 결말은 마흔 고개를 넘으며 손홍규가 도달한 부부 관계에 대한 중간 결산이라 하겠다. “언제부턴가 그는 그렇게 집으로 가출해버렸다. 풀리지 않는 질문을 여전히 가슴에 품은 채 기꺼이 오래 흔들리기 위해.” 최재봉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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