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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25살 차이 장석주·박연준 시인 책으로 엮은 늦은 청첩장…불 속으로 걸어가는 한쌍의 단도처럼

등록 2015-12-28 20:40

왼쪽부터 박연준, 장석주 시인. 두 시인이 함께 낸 책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왼쪽부터 박연준, 장석주 시인. 두 시인이 함께 낸 책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신혼여행 같은 시드니의 한달
<서재 결혼 시키기>라는 책이 있었다. 독서광인 남녀가 결혼 뒤 서재를 합치는 미국 이야기. 그와 달리 박연준(35)·장석주(60) 두 시인이 함께 낸 책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난다)는 책을 통해 두사람의 결혼 사실을 알리는, 청첩장과도 같은 책이다. 10년 열애 끝에 올 1월 혼인신고를 했지만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았던 이들이 9월 초부터 한달 동안 호주 시드니에서 살았던 기록이다.

“시드니 교외 주택에서 보낸 심심함을 품은 나날들. 베란다에 의자를 내놓고 햇볕을 쬐고 책을 읽으며 한가롭게 보낸 시간들. 붉은 포도주를 마시며 취기의 아득함 속에 있던 그 다정한 저녁들. 나는 술 없이 하루도 견딜 수 없는 주당은 아니지만 저녁마다 붉은 포도주를 마셨다. 더러는 취해 포도주의 혼이 불러주는 빛과 우애가 가득한 노래를 들었다.”(장석주)

책은 시드니 북서쪽 동네 글레노리의 한 동포 집을 빌려 일종의 신혼여행처럼 지냈던 날들을 들려준다. 책 한가운데 16쪽짜리 사진첩을 경계로 앞부분은 박연준 시인의 기록이고 뒷부분은 장석주 시인의 글. 두사람이 함께한 시공간과 경험을 각자의 필치에 담다 보니 비교해 가며 읽기에 재미지다. 가령 두사람이, 여느 신혼부부처럼, 사소한 일로 다투고 삐쳤던 어느날 술이 약한 박 시인은 빈속에 포도주 한 병을 다 들이붓고 취해서 쓰러졌다. 자는 동안 “태아처럼 옆으로 누워 와인을 슬글슬금 토했다”는 박 시인. 그 모습을 목격한 장 시인의 반응은 그의 글로 만나 보자.

“혼절한 듯 쓰러진 채 머리를 시뻘건 핏속에 담근 P(피: 박연준 시인을 가리키는 장 시인의 호칭. 박 시인은 장 시인을 ‘제이제이’(JJ)라 일컫는다)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머리가 깨져서 피가 흥건해진 거라고 상상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가까이 다가가보았다. 단숨에 들이켠 레드와인을 바닥에 다 게워냈는데, 그것은 완전한 핏빛이었다. P의 머리를 들어올리며 그게 피가 아니라 레드와인을 토한 것임을 알았다.”

포도주 사건은 시드니 살이의 예외적이며 극단적인 사례이고, 실제로 두사람은 시드니의 명물 오페라하우스를 구경하거나 그 안 공연장에서 뮤지컬을 관람하거나 카지노에서 밤을 새우며 많지 않은 돈을 탕진하거나 페리를 타고 시드니 건너편 크리몬 포인트로 ‘여행 안의 여행’을 떠나는 등 여행자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한다. 짧은 시간 머무는 이방인으로서 그들이 가장 많이 한 일은 역시 걷기였다.

“신발끈을 단단히 조여매고 태평양을 끼고 펼쳐진 시드니 거리를 걸어보는 것, 그것이 시드니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짜릿하고 흥미로운 모험이다.”(장석주)

“이유 없이 가슴이 뭉클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바다를 잠깐 건너는 것뿐인데 무언가 중요한 것과 작별하는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은 살면서 많이 오지 않겠구나. 지금 내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박연준)

25년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아름다운 책 결혼식을 치른 두 시인의 결혼 서약을 들어 보자. 박연준 시인이 시 형식으로 쓴 서문의 일부다.

“우리는 새벽의 나무 둘처럼/ 행복합니다./ 잉걸불 속으로 걸어가는 한 쌍의 단도처럼/ 용감합니다.// (…) // 이 책은 우리의 결혼 선언을 대신할 것입니다./ 각자의 글이 빵과 소스 같기를,/ 그렇게 어우러져 읽히기를 바랍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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