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집착과 울컥을 넘어 지혜로

등록 2016-02-25 20:09

시인 이재무. 사진 이정아 기자 <A href="mailto:leej@hani.co.kr">leej@hani.co.kr</A>
시인 이재무.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집착으로부터의 도피
이재무 지음/천년의시작·1만2000원

시인 이재무가 세번째 산문집 <집착으로부터의 도피>를 펴냈다. 자신이 대표직을 맡고 있는 출판사 천년의시작에서 새로 출범한 산문 시리즈 ‘천리향 산문집’의 첫 책이다.

그가 쓴 첫 시는 대학 교지에 실린 ‘엄니’였다. “마흔여덟 옭매듭을 끊어버리고/ 다 떨어진 짚신 끌며/ 첩첩산중 증각골을 떠나시는 규/ 살아생전 친구 삼던 예수를 따라/ 돌아오리란 말 한마디 없이/ 물 따라 바람 따라 떠나시는 규 엄니”로 시작하는 작품이다. 마흔여덟 이른 나이에 고된 노동과 병치레에 스러진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날 밤 “잠든 식구들 몰래 일어나 방구석 저 홀로 외로운 앉은뱅이책상 위에 놓인 부의록(賻儀錄)을 끌어다 빈 페이지를 열고” 이 시를 썼다고 했다. 당시 가난한 농사꾼 아낙으로는 드물게 중학 중퇴 학력을 지닌 어머니는 시인이 학교에 들어가기 전 뒤꼍 아궁이 앞에서 부지깽이를 활용해 시인에게 처음 글자를 가르쳐 주기도 한 그의 문학 스승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어떠했던가. ‘아아, 아버지!’라는 감탄사와 느낌표를 앞세우게 되는 아버지인즉, “내게 가난과 다혈질을 유산으로 물려주신 아버지! 애증과 연민의 대상이신 아버지! 온몸을 필기도구 삼아 뜨겁게, 미완의 두꺼운 책을 쓰다 가신 아버지!”로 회고된다. 술에 취하면 가족들에게 마구잡이 폭력을 행사하던 무서운 아버지였지만 그 아버지는 동시에 노동에 찌든 “작고 초라한 촌부”로, 식구들이 모두 잠든 한밤중 장독대에서 숨죽여 흐느끼는 “나약한 고독의 존재”로, 사랑채에서 집안 할아버지에게 매를 맞는 아이 같은 면모로 전혀 다르게 다가오기도 한다. 쉰아홉에 세상을 뜬 아버지에 대한 생각은 ‘추석’이라는 시 앞부분에 이렇게 그려진다.

“쉰다섯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아버지 나이. 엄니 돌아가신 뒤/ 두어 해 뒤꼍 그늘처럼 사시다가/ 인척과 이웃 청 못 이기는 척/ 새어머니 들이시더니/ 생활도 음식도 간이 안 맞아/ 채 한 해도 해로 못하고 물리신 뒤로/ 흐릿한 눈에/ 그렁그렁 앞산 뒷산이나 담고 사시다가/ 예순을 한 해 앞두고 숟가락 놓으셨다”

책에는 이밖에도 등단 30년을 넘긴 자신의 문학 세계에 관한 글들, 그가 남 못지않게 열심인 페이스북의 빛과 그늘을 조명한 글, 삼십대 후반 유부남과 스물한살 미혼 여성으로 만났던 옛 연인에게 보내는 글 등이 두루 실려 있다. 젊은 연인과 헤어진 지 십여년 뒤에 쓴 글에서는 연륜에 수반되는 체념 섞인 지혜가 짚인다.

“내게로 왔던 것들은 언젠가 다 가게 마련입니다. 젊은 날은 내게로 오는 것들만 눈에 띄더니 이제는 내게서 멀어지는 것들이 눈에 더 자주 밟힙니다.”

최재봉 기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