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쉼보르스카의 마지막 시집들

등록 2016-03-10 20:34

잠깐독서
충분하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문학과지성사·1만3000원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1923~2012)의 마지막 시집이 번역 출간되었다는 소식에 권성우·오길영 같은 평론가들은 페이스북에 환영과 기대의 글을 다투어 올렸다. 2007년에 소개된 시선집 <끝과 시작>을 읽은 감동이 그런 기대로 이어졌을 터였다. <충분하다>는 타계 직후인 2012년 4월에 나온 같은 이름 유고 시집과 2009년 시집 <여기>를 한데 묶은 책이다.

‘충분하다’라는 제목을 시인은 생전에 정해 놓았다고 한다. 어쩐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마지막 책 <이게 다예요>를 떠오르게 한다. 죽음을 앞두고서 마지막으로 짜낸 문학적 에너지,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문학인으로서 지나온 생에 대한 겸손한 자족이 그 제목들에서는 읽힌다.

“우리의 손가락 다섯 개, 그 각각의 끝에 있는/ 스물일곱 개의 뼈,/ 서른다섯 개의 근육,/ 약 2천 개의 신경세포들./ <나의 투쟁>이나/ <곰돌이 푸의 오두막>을 집필하기엔/ 이것만으로 충분하고도 넘친다.”(‘손’ 전문)

이 시에서 손은 글을 쓰는 한 인간 또는 다른 어떤 식으로든 삶의 흔적을 지상에 남기는 행위 일체를 대리한다. 손을 이루는 뼈와 근육과 신경세포의 협업으로 인간은 무언가 의미 있는 결과물을 낳으며 그 일은 인간이라는 존재와 세상이 존립하고 유지될 근거가 된다.

“레이크스 미술관의 이 여인이/ 세심하게 화폭에 옮겨진 고요와 집중 속에서/ 단지에서 그릇으로/ 하루 또 하루 우유를 따르는 한/ 세상은 종말을 맞을 자격이 없다.”(‘베르메르’ 전문)

쉼보르스카의 시는 평이한 언어로 누구나 공감할 만한 통찰을 내보인다. 번역이라는 장벽을 넘어 그의 시가 한국 독자들을 매료시키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 ‘충분하다’라는 말로 문학적 삶을 마무리한 시인답게 이내 맞게 될 죽음에 대해서도 그는 끝까지 담담하다.

“존재했다, 그리고 사라졌다./ 존재했다, 그래서 사라졌다./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정해진 순서에 따라서,/ 왜냐하면 이건 돌이킬 수 없는 게임의 법칙이므로.”(‘형이상학’ 앞부분)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