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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헤매다 동주 묘 찾곤 감격에 겨워 말 못 이었다”

등록 2016-03-15 20:04수정 2016-03-15 20:13

일본의 한국문학 연구자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 명예교수가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소명출판사에서 윤동주 시집 초판본을 보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일본의 한국문학 연구자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 명예교수가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소명출판사에서 윤동주 시집 초판본을 보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한국학자 갈 수 없던 수교 전
육필원고도 최초로 조사·검토
일본인 이유로 성취 폄훼되기도
저작집 한국 출간 협의차 내한
“영화 ‘동주’ 보고 싶다”
연변과 백두산을 여행하는 이들 중 상당수는 용정을 거쳐 명동촌을 다녀온다. 용정에는 ‘선구자’ 노래에 나오는 일송정과 해란강 그리고 동주의 사촌 송몽규가 다녔고 동주 기념관과 시비가 있는 대성중학(현 용정중학)이 있다. 윤동주의 고향인 명동촌에는 동주가 다녔던 옛 명동교회가 남아 있으며 동주의 생가가 복원돼 있고 인근 산자락에는 동주의 묘도 있다.

해방을 불과 반년 앞둔 1945년 2월16일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진 윤동주는 화장 뒤 뼛가루 형태로 돌아와 이곳에 묻혔다. 그러나 해방과 분단,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등 현대사의 격변 속에 묘지는 잊혔다. 1948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처음 출판된 뒤 한반도 남쪽에서 동주가 가히 ‘민족 시인’의 반열에 오르는 동안, 특히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중국 안에서는 윤동주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가 되었다. 무덤은 돌보는 이 없이 방치되었다. 마침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게 되었다.

1985년 5월 한 일본인 학자가 망실되었던 윤동주의 묘를 ‘발견’했다. 와세다대 재외연구원으로 그해 4월부터 1년 동안 연변대학교에 연구 유학했던 오무라 마스오(83) 현 와세다대 명예교수가 그다. 오무라 교수는 그 전해 여름 일본 도쿄에 와 있던 동주의 동생 윤일주 교수(성균관대 건축공학과)한테서 형의 묘를 찾아 달라는 간곡한 부탁과 함께 묘지의 대략적인 위치를 담은 약도를 건네받은 터였다. 당시는 한국과 중국 사이에 국교가 수립되기 전이라 한국인의 현지 방문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동주의 묘가 있는 용정은 당시 외국인이 마음대로 갈 수 있는 데가 아니었습니다. 공안의 허가증을 받아 5월14일 연변대학 교수 등 몇분과 같이 동주의 묘가 있다는 옛 동산교회 묘지를 뒤졌습니다. 묘지는 그동안 관리가 안 되어 묘지라기보다는 숲과 밭이 드문드문 널려 있는 산자락이었어요. 동주의 묘도 다른 묘들처럼 문화혁명 때 파괴되어 버린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지요. 일행이 위와 아래로 나누어 네댓시간쯤 헤맨 끝에 마침내 당시 연변대학 조선문학 교연실 강사였던 이해산 선생이 ‘시인(詩人)’이라는 글자가 적힌 묘비를 발견했습니다. 그렇게 동주의 묘를 확인한 순간, ‘여기로구나!’ 싶은 마음에 감격에 겨워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지요.”

‘오무라 마스오 저작집’ 출간 협의차 방한한 오무라 교수는 30년 넘은 옛일을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11일 오후 서울 서초동 소명출판 회의실에서 그를 만났다. 오무라 교수는 동주 묘를 확인한 닷새 뒤 다시 묘를 찾았다. 두만강 송어와 조선산 명태 등을 진설하고 유기 제기를 사용한 순 조선식 제사를 올렸다. 오무라 교수는 동주의 묘를 확인한 사실을 중심으로 동주 생가터와 동주가 다녔던 광명중학 학적부, 송몽규 생가와 광명교회 등을 확인한 결과를 담은 논문 ‘윤동주의 사적(事跡)에 대하여’를 <조선학보>(1986년 10월)에 발표했다. 그러나 동주의 동생 윤일주 교수는 그가 연변에 있는 동안 타계했고, 중국과 한국 사이에 전화는 물론 편지 연락도 불가능했던 터라 오무라 교수는 이듬해 귀국 뒤 한국을 방문해 윤일주 교수의 묘에 참배하면서 비로소 형의 묘를 찾았다는 사실을 ‘보고’할 수 있었다.

‘민족 시인’ 윤동주의 묘를 처음 발견한 이가 일본 학자라는 사실에 한국의 일부 언론은 “역사의 아이러니” 운운하며 미묘한 반응을 보였다. 한국 학자의 접근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일본인이라는 특권적 지위 덕을 본 것이라며 발견의 의의를 애써 깎아 내리는 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오무라 교수가 윤동주의 육필 원고를 최초로 조사하고 검토한 학자라는 사실 앞에 그런 폄훼는 설 자리를 잃는다.

“동주의 묘를 확인한 사실을 사진과 함께 보고한 뒤 저는 어느 정도 유족들의 신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1986년 여름 동주의 육필 원고를 눈으로 접할 수 있었어요. 동주의 친우인 정병욱 일가가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해 마루 밑 독에 묻어 두었던 자선시고집, 역시 친구인 강처증이 보관해 온 유품과 작품, 누이동생 윤혜원 부부가 해방 뒤 용정에서 가지고 내려온 창작 노트 등이었지요. 그때까지 윤동주 문학과 관련해서 숱한 연구서가 나오고 많은 논문이 발표되었는데도 정작 육필 원고를 보겠다며 찾아온 학자는 없었다고 했습니다. 동주의 육필 원고를 처음 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역시 일본인이 처음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지 유족은 원고를 본 사실을 공개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오무라 교수가 동주의 육필 원고를 최초로 확인한 때로부터 무려 10년 뒤에야 왕신영 단국대 교수가 육필 원고를 보고 싶다며 유족에게 요청했다. 유족의 말을 빌리면 ‘윤동주의 제1차 자료를 상세하게 보고 싶다고 밝힌 지구상 두번째 인물’이었다. 오무라 교수와 왕 교수, 심원섭 연세대 강사와 유족인 윤인석 성균관대 교수가 함께 엮은 <윤동주 자필시고전집>(1999)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윤동주 연구의 텍스트 비평을 위한 일차 자료가 비로소 갖추어진 것이다.

오무라 교수는 이밖에도 동주의 릿쿄대와 도시샤대 학적부와 성적표, 도쿄 거처, 독서 이력 등 일본 유학 시절 행적과 자취를 탐구한 논문, 그리고 도시샤대 교정에 세워진 ‘서시’ 시비 중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의 일본어역 적합성 문제를 제기하는 등 윤동주와 관련한 연구를 꾸준히 진행했다. 그 결과를 담은 논문집 <윤동주와 한국문학>이 2001년 소명출판에서 출간되었으며 역시 소명출판이 전체 6권으로 기획한 ‘오무라 마스오 저작집’의 제1권으로 이달 중에 다시 나온다.

윤동주 시의 매력을 묻는 질문에 오무라 교수는 “성실하고 내면적인, 모든 것을 내면으로 내면으로 추구해서 표현하는 젊은이가 쓸 수 있는 시라고 생각한다. 시대가 달랐다면 동주는 동시를 쓰는 시인이 되었을 텐데 시대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최근 한국에서 이는 윤동주 바람과 관련해서는 “유명해지든 그렇지 않든 윤동주의 가치는 그대로일 것”이라면서도 “영화 <동주>를 보고 싶다”고 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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