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모던
-60년대 한국 개발 체제의 기원
한석정 지음/문학과지성사·2만8000원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성지,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의 땅, 모던의 낭만과 실향의 정서가 교차하던 근대적 장소로 소환되곤 한다. <만주 모던>은 이에 질문한다. 과연 그런가?
<만주국 건국의 재해석>(1999, 개정판 2007), <만주, 동아시아 융합의 공간>(공저, 2008)을 지었고 만주학회 회장을 역임한 만주 전문가 한석정 동아대 사회학과 교수가 10여년 연구성과를 집대성했다. 만주국 정부간행물, 신문, 1960년대 <정부 관보>와 언론 자료, 귀환자들 인터뷰 등을 모아 1930~40년대 만주와 60년대 한국을 연결하는 커다란 그림을 그렸다.
지은이는 1960년대 한국의 ‘불도저식 재건 체제’를 만주국(1932~45)에서 본떴다고 분석한다. 식민지와 근대가 복잡하게 뒤엉킨 60년대 한반도 체제가 만주국의 속도전과 총력전을 변용, 모방했다는 점을 이 책은 정교하게 보여준다. 친일-항일, 좌우의 이분법적 틀이 아니라, “이념들이 놓치는 지글지글한 현실”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만주를 연상하면 스펙터클한 ‘만주 웨스턴’이 떠오른다. 땅을 가로지르는 무거운 열차, 추격전, 의리, 낭인 기질 같은 남성성을 포괄한 이미지다. 만주는 폭력이 난무하던 혼란스러운 사회이자 동시에 기회의 땅이었다. 1천만명의 이동을 초래한 동양의 엘도라도였고, 조선인만 약 200만명이 이주한 지역이다. 출발부터가 전쟁이었다. 만주국은 일본 관동군이 1931년 군벌 장쉐량 체제에 도발해 이듬해 세운 국가로, ‘건국’도 전쟁하듯 했다.
생산증진에 관한 만주국 포스터와 만주국 건국 5주년 기념우표(기시 도시히코 교수 제공),
‘항일독립군의 고향’쯤으로 생각되지만, 만주는 사실 다양한 조선인들이 중층을 이뤘다. 일제 침략전쟁이나 병참기지화 정책에 적극 부응한 관리, 의사, 교사, 교수, 아편 장수, 농민, 노동자, 펑톈 군관학교 출신의 군인들도 마구 섞여 있었다. 박정희, 정일권, 백선엽, 국방사학자 이선근, 작곡가 김성태 등은 호미 바바의 말대로 식민자와 “꼭 같지는 않으나 비슷한” 이들로서 ‘재건’ 체제를 이끌었다.
남한이 만주국을 결정적으로 소환한 계기는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였다. 도쿄 전범재판에서 에이급 전범으로 사형을 언도받았던 기시 노부스케 중심의 만주그룹은 일본에서도 실세였다. 박정희는 재건 체제로서 기시가 추진했던 만주국의 산업화·통제경제 스타일을 원했고, 결국 일본에 가서 기시를 만났다. “한일 만주그룹의 결합”이었다.
한국 제1차 경제개발계획 기념우표(한석정 교수 소장본).
1960년대 한국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반공대회, 표어 제작, 집단체조 등은 만주국 시절 행해지던 것들이다. 만주국 정부는 ‘건국’을 구호 삼았고 ‘건국정신’을 창안했다. 박정희 정권은 ‘재건’을 내걸었고 ‘민족정신’을 만들었다. 만주국 전시 경영에 적극 참여했던 ‘국방사학자’ 이선근은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반공주의, 국가주의를 한껏 담은 이 선언은 “암송하기 쉽게 운율에도 공을 들였다”. 이선근은 <화랑도 연구>로 충효를 강조했고, 이순신을 부각했으며, 만주국과 비슷한 용어 ‘건국 이념’도 가다듬었다. 한국식 민족주의, ‘한민족 주체성’ 담론이라는 우물을 판 셈이다. 유교를 탄압한 초기 일본 메이지 정부와 달리 만주국은 충효를 부르짖었고, 유교를 국가이데올로기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박정희 정권 또한 유교를 복원하고 국가 가부장을 도모했다.
‘국방국가’였던 만주국은 1960년대 한국의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구호의 모델이었다. 대규모 토목공사, 건축에서 나타난 직선적 공간, 르 코르뷔지에풍의 신도시 개념, 각종 산업단지, 신시가지 정책… 이 또한 군사작전과 맞먹는 만주국의 ‘직선’과 ‘속도’에 맞닿아 있다. “광활한 지형의 신속한 변형, 무한한 야심, 주민들의 강제 이주 및 희생의 정당화”는 ‘하이 모던’의 핵심이었다. 도시 빈민, 철거민은 타자화되었다.
재건에는 인구 동원이 필요했고, 따라서 강건하면서도 유순한 신체 만들기가 필연이었다. 국민체육진흥법은 내용조차 만주국과 유사했고 만주국 ‘건국 체조’를 본떠 60년대 ‘재건 체조’도 보급했다. 만주국 ‘국책영화’는 <대한뉴스> 같은 한국 기록영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여성도 적극 동원되었다. 근대 한국의 ‘현모양처론’은 만주국의 ‘현처양모론’과 거리가 멀지 않다. 만주국 위생담론은 5·16 뒤 군정이 이어받아 아동의 신체를 규율하고 ‘사회 정화’ 차원으로 깡패를 소탕하는 데도 활용했다.
종합하면, ‘만주 모던’은 한국인이 내면화한 근면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 시공간의 개념이다. 1960년대 한국은 만주국식 체제를 변용해 압축적 근대화를 이루며 세계 최빈국 지위를 빠르게 탈출했다. 여기서 지은이는 만주를 둘러싼 항일-친일, 비극적 유랑-친제국주의 구분 잣대에 머물지 않으려 한다. 친일청산과 이념에 따른 낙인찍기라는 난제에 시달리는 현재 한국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고려하면 다소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다 보면 현재 한반도가 왜 이렇게 어려운 민족주의, 민주주의, 식민주의, 분단, 냉전, 이념, 근대라는 복잡한 관계의 중심에 놓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 곳곳에 보인다. 2000년대 이후 세대의 삶까지 꼬아버린 한국 근현대사의 매듭, 그 시작은 만주였던 것일까.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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