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트레버(88)는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다. 아일랜드 출신으로 영국으로 이주한 뒤 30대 중반에 전업 작가가 되었으며 휫브레드상, 오헨리상 같은 유수의 문학상을 받았다. 장편도 쓰지만 단편에서 특히 빼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작가 줌파 라히리는 트레버의 <단편집>(1992)을 읽고 “이 책에 포함될 만한 단편을 딱 하나만 쓸 수 있어도 행복하게 죽을 수 있겠다”고 말한 바 있다. <비 온 뒤>(1996)는 영어권 최고의 단편 작가로 꼽히는 트레버가 <단편집> 이후 처음 묶어 낸 소설집이다.
트레버 단편의 주인공들은 삶의 고빗길에서 돌부리에 발이 걸려 비틀거리거나 아예 쓰러진 상태로 등장한다. 위태롭고 힘겨운 처지에서 안간힘을 다해 균형을 잡으려 또는 다시 일어서려 애쓰는 그들의 상처와 고통, 인내와 용기를 작가는 짐짓 심상하고 잔잔한 어투로 그린다. 그들이 겪는 시련과 전투는 트레버의 필치를 통과하면서 어느덧 인간 보편의 운명과 성장의 드라마가 된다.
‘티머시의 생일’의 육십대 부부는 장성해서 따로 사는 외아들 티머시의 생일을 맞아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들로 상을 차린다. 그러나 동성애자인 티머시는 “평생에 걸친 사랑의 찬양”의 본보기와도 같은 집안 분위기가 싫어 어린 남자 파트너 에디를 대신 보낸다. 부부는 낙담한 내색을 감추면서 아들 대신 에디를 정성껏 대접하는데, 에디는 부부의 집에서 값진 은제품 장식을 훔쳐 나온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들에게서 자라난 질투, 교활함과 잔인함으로 피어나고 만 질투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날의 아픔은 쉽게 가시지 않을 테고, 둘 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도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루’의 주인공 레스웨스 부인은 우연한 기회에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된다. “서른여섯, 또는 그보다 약간 어린 엘스페스”의 실물을 본 적은 없지만 부인의 머릿속은 남편과 그 여자가 함께 있는 장면으로 가득하다. 자신의 불임이 원인이라 짐작하는 부인은 둘 사이에 아이가 있다는 상상을 하면서 불안을 술로 달랜다. “그는 늘 그렇듯이, 그녀를 안아 옮길 때 부드럽다.” 7월의 새벽부터 저녁까지를 그린 이 소설은 이처럼 여운을 남기는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감자 장수’에서 신부의 아이를 밴 엘리는 삼촌의 주선으로 ‘야비한’ 감자 상인 멀리비와 위장 결혼을 한다. 아이는 멀리비를 아비로 알고 성장하는데, 아이가 열살이 될 무렵 엘리는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려준다. 그로부터 다시 1년 뒤, ‘사랑의 순교자’ 엘리와 ‘야비한 속물’ 멀리비의 관계가 역전되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를 알아온 그 모든 시간 동안 그녀는 한번도 그를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사랑을 받지도 못하면서 앞에 서는 것이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엘리는 비로소 깨닫는 것.
최재봉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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