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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골목길 영세 상인들, 숨어서 말고 대놓고 울었으면…”

등록 2016-06-12 18:26수정 2016-06-12 21:31

박명균(46)씨
박명균(46)씨
[짬] 자전 에세이집 낸 과자장수 박명균씨
박명균(46)씨는 동네 문구나 슈퍼, 팬시점 등에 과자를 대주는 과자장수다. 도매상에서 받은 과자를 트럭에 싣고 거래처를 매주 한두 차례 돈다. 아폴로나 달고나, 쫀드기 같은 저가 과자를 주로 취급한다. 스물일곱에 결혼한 뒤 잠시 학습지 영업사원 등의 일을 한 뒤 과자를 팔기 시작했으니,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가 최근 자전적 에세이집 <나는 언제나 술래>(헤르츠나인)를 펴냈다. 여기엔 필자가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고단한 자영업자들의 울음이 흠뻑 스며 있다. 박씨의 눈물도 한가득이다. 참교육 1세대로 ‘고등학생 운동’(고운)을 했던 박씨는 대학을 건너뛰고 바로 사회에 뛰어들었다. ‘고딩’ 때 무려 세 권(공저 2권 포함)의 책을 내기도 했다. 지난 8일 인천 갈산역 부근 과자 도매상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87~91년 고등학생 운동 참여
“중3때 전태일 평전 독서토론서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첫 각성

”진학 접고 20년 가까이 과자장수
책에서 대기업 건물주 등 횡포로
눈물 흘리는 사장님들 삶 증언

고3 때 전교조 교사 1500명이 강제해직됐다. 1학년이던 87년엔 6월 항쟁이 있었다. 도도한 민주화 흐름에서 고교생도 빠질 수 없었다. 이렇게 고운이 태동했다. 그도 고운에 적극 참여했다. 고3 때 ‘우리반 반장’이란 글을 써 학내에 배포했다. 투표로 자신이 반장이 됐으나 성적 미달을 이유로 다시 반장을 뽑게 한 학교를 비판하는 글이었다. 2학년 때 독서동아리 ‘초록빛 내리는 방’을 만들어 자주적인 학생회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박씨는 학교 쪽의 기피 인물이었다.

그는 내처 직선 학생회, 동아리 활동 자율화 등을 요구하는 교내 집회를 열려 했다. 뜻은 이루지 못했고 대신 그를 포함해 15명이 징계를 당했다. 무기정학 통보를 받은 박씨는 “교과서를 반으로 찢었다”. 2주 만에 등교했으나 가방엔 교과서는 없었다. 읽고 싶은 책만 담았다. “고교 때 500권, 졸업한 뒤 2년 노가다 하면서 500권, 모두 1천권의 책을 읽었죠.”

무엇이 그를 변화시켰을까. “중3 때 전교조 성향의 젊은 교사들이 5~6분 계셨죠. 어떤 분은 도깨비탈을 쓰고 수업하시기도 하셨어요. 당시 독서모임에 들어가 책을 읽기 시작했죠.” <전태일 평전>은 큰 충격이었다. ‘어린 여공들을 위해 그렇게 자기를 희생하다니.’ 평전을 읽고 나서 그는 여동생을 불러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동안 때린 거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중3 때)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본다는, 그런 메시지가 다가왔어요. 나를 돌아보게 해주었죠. 인간으로 태어나 처음 한 각성이었어요.”

졸업 뒤에도 2년 동안 노동일을 하며 고운을 계속 했다. “(같이 운동했던 선후배 가운데) 15% 정도가 대학을 포기했어요. 가출이나 자살, 이런 극단적 선택 아니면 진학을 희망하는 부모님 의지를 꺾기가 쉽지 않았죠.”

각자 가는 길은 다르지만 “당시 가졌던 생각들이 고운을 했던 이들의 생활에 반영이 되는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직접 현실에서 작용을 하진 못해도 (학생 때 가진) 그런 갈등구조를 내 가슴에 안고 가는 것 같아요.” 그 동지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노조 간부도 있고, 특히 선생님이 많아요. 한 선생님은 최근 아이들 2명을 구하고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대학을 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진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다”고 맞받았다. “저는 당시 서클장으로 친구들을 꼬시는 입장이었죠. 대학 가려고 했다면 당시 찢은 교과서를 다시 붙여야 하는데…. 그때(교과서를 찢었을 때) 마음에서 선을 그었어요.”

과자장수 박씨는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주 6일 일한다. 그의 애마인 2.5t 트럭엔 1천여종의 과자, 초콜릿이 빼곡하다. 운동을 같이 했던 후배와 결혼하고 나서 가장 노릇을 위해 뛰어든 게 이 일이다. 골목길 사장님의 마음을 열어 거래를 터야 하고 그 뒤엔 매출을 1원이라도 더 올려야 한다. “거래처에서 커피를 1만잔 정도 마시면 월수입이 100만원 정도 올라간다고 하더군요.”

그가 환심을 사야 하는 골목길 사장님들의 삶도 결코 녹록지 않다. 건물주나 대기업 횡포에 눈물을 머금고 가게를 닫아야 하는 이들이 숱하다. “골목길에 들어가면 비명소리가 들립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침묵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누군가 말해야 하죠. 이 사람들은 편하게 울지도 못해요. 사람들 앞에서 울면 더 공격당한다고 생각하죠.” 골목길까지 파고드는 편의점 공세에 슈퍼는 맥을 못 추고, 학교가 준비물을 나눠주면서 쓰러지는 문구점이 속출했다.

“예전에 과자장수 4명이 하던 구역을 제가 지금 혼자 하고 있어요. 그만두는 분들의 거래처를 인수해서 그나마 버티고 있어요.” 그의 영업 공간은 인천에서 경기도 고양시 일산, 서울 상계동, 경기도 의정부까지 갈수록 넓어지고 있다.

거래처 150군데에 책을 돌렸다. “(책을 준 뒤) 다시 갔을 때 그런 표정을 처음 봤어요. 마치 애인을 본 것처럼 제 눈을 묵묵히 바라보더군요. 오랜 기간 갈등이 있었던 사장님도 마찬가지예요.” 왜 그랬을까. “저의 고백을 보고, 자기 안에 있던 공격적 가면을 벗어던진 것 아닐까요.”

‘가난은 왜 무서운가’란 소제의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난은 손발이 묶인 나를 쥐새끼가 물어뜯는 고통이다.’ 이 나라에서 가난은 영혼까지 물어뜯어 사람이기를 포기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모든 삶에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사회가 70~80%의 삶에 의미 부여을 안 해줍니다. 이 사람들의 삶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확산되어야 해요. 특히 이(70~80%) 사람들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숨어서 울지 말고 대놓고 울어야 합니다.”

글은 대부분 운전하면서 썼다. 출근 시간 운전 중에 제일 많이 쓴다. 신호대기 중에 단어나 문장을 메모한다. 메모하지 않고 거래처에 가면 아무 생각도 안 나기 때문이다. “정말 내 가슴에 와닿는 문장이 있고 메모할 상황이 아니면 그냥 울면서 거래처로 갑니다. 울어야만 그 문장이 생각나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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