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연금제도 개혁 등으로 사회복지가 정부 몫에서 개인 책임으로 크게 이전되면서 계층과 성, 지역을 아우르는 ‘투자자 사회’가 도래하고 있다. 또한 기업의 투명성 제고와 경제적 민주화를 위한 ‘투자자 운동’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사진은 올해 3월 열린 한 기업의 주주총회 모습이다.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미국선 간접금융투자 늘면서 노동자·서민도 스스로 투자자로 여기며 공화당을 지지한다
한국도 투자자 수가 임금노동자 추월 계층·성·지역 경계 넘은 새 계급 떠올라
포커스
지난 해 가을 치러진 미국 대통령선거. 선거전을 달군 핵심 쟁점은 단연 이라크 전쟁이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의 집권 1기 기간에 발생한 9·11 테러의 여파가 선거 지형에 강하게 영향을 끼친 데다, 72년 대선 이후 ‘전쟁 중’에 치러지는 첫 번째 대선이라는 점도 미국의 대외정책을 대선의 주요 변수로 만드는 데 힘을 보탰다.
하지만 지난 해 대선의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는 데 있어 또 하나의 숨겨진 이슈를 빼놓을 수 없다. 바로 연금개혁 문제다. 지난 해 대선은 2차 대전 이후 출생한 베이비붐 세대들이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은퇴를 하기 이전에 치러지는 마지막 선거였다. 지난 해 대선 결과를 ‘경제적’ 잣대로 가늠해보는 일이 매우 중요한 건 이 때문이다.
실제로 재집권에 성공한 부시 대통령은 연금제도를 손질하기 위한 고삐를 바짝 죄기 시작했다. 부시 대통령이 첫 포문을 연 것은 집권 2기 구상을 공식적으로 밝힌 올해 2월의 국정 연설장에서였다. 그가 들고 나온 무기는 바로 미국의 공적 연금에 해당하는 사회보장세(payroll tax)에 개인계좌(personal accounts)를 도입하겠다는 계획. 부시 대통령은 세율 12.6%인 현재의 사회보장세를 정부가 일괄적으로 걷는 대신, 약 3분의1(4%)에 해당하는 금액을 개인의 희망에 따라 개인계좌를 만든 다음 여기에 적립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이 안의 핵심은 이렇게 적립된 자금을 가지고 개인이 자유로이 금융시장에 투자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수익률이 올라가면 개인이 노후에 받을 연금액의 규모도 덩달아 커지므로 개인에게도 이익일뿐더러, 정부로서도 연금 재정의 고갈이라는 난제를 벗어던질 수 있다는 게 이 안의 장점으로 부각됐다.
이후 부시 대통령의 개인계좌 도입 계획을 놓고 미국 사회가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있는 건 이 제도에 담긴 의미가 단지 연금제도를 부분적으로 손질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야를 조금 넓혀 바라보면, 이 제도는 자본주의 역사상 100년 이상의 전통을 갖는 사회보장제도의 근간을 새로이 자리매김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지금껏 사회보장제도가 단연 ‘정부의 과제’였다면, 개인계좌 제도는 그것을 소롯이 ‘개인의 책임’ 영역으로 옮겨 놓는다. 그간 사회보장제도의 ‘수혜자’였던 개인을 금융시장의 당당한(!) ‘플레이어’로 탈바꿈시키는 셈이다.
수혜자에서 금융 ‘플레이어’로
개인의 노후가 금융시장에 내맡겨지는 일은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이제 결코 낯선 일이 아니다. 이미 자본시장의 공룡으로 탈바꿈한 국민연금 등 각종 연기금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대부분사람들의 경제적 운명은 (의식하건 못하건 간에) 금융시장과 한데 맞물려 돌아간다. 여기에 더해 올 연말부터 도입될 퇴직연금은 이제 우리에게도 이른바 ‘투자자 사회’의 지평이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탄이 될 게 분명하다. 기업복지부담을 줄이려는 사용자쪽의 요구와 자본시장 기반을 확충하려는 정부의 필요가 맞아 떨어져 탄생한 퇴직연금제도는 ‘연금(복지)의 금융화’를 더욱 재촉할 것이다. 보험개발원이 추정한 바에 따르면, 국내 퇴직연금시장 규모는 올해 45조원에서 출발해 2010년께는 67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평균근속연수가 6년도 채 안 되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직장 이동이 빈번한 사람들에게 연금적립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통산장치(개인퇴직저축계좌)가 마련된 것도 퇴직연금시장을 더욱 활성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금융시장의 기대대로 매달 일정액을 납입하는 확정기여형(DC) 방식이 퇴직연금제도의 대세로 자리 잡을 경우, 개인의 노후가 금융시장에 의존하는 정도는 더욱 심해질 게 불 보듯 뻔하다. 이처럼 연금제도 수술이라는 외피를 뒤집어 쓴 채 각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커다란 흐름의 본질을 이해하는 실마리는 바로 다양한 계층의 사회구성원을 ‘투자자’로 단일화시키는 메커니즘에 있다. 계층과, 성, 인종과 지역 등 그간 한 사회 구성원의 존재 기반과 의식구조를 갈라놓았던 기준들은 어느덧 사라지고, 이제 ‘투자자’라는 공통된 이해에 따른 편가르기가 그 자리를 새롭게 꿰차는 것이다. 바야흐로 투자자 사회의 탄생이다. 다양한 계층이 한 덩어리로 투자자 사회의 출현에 담긴 의미를 차분히 짚어봐야 하는 이유는 단지 ‘휘발성 강한’ 금융시장의 행보가 개인의 운명을 더욱 옥죌 것이라는 데 그치는 게 아니다. 산업사회 이래 오랜 기간 뿌리내린 사회정치적 권력 지형 자체를 변화시키는 촉매제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기업연금(401k)을 통한 간접투자가 크게 늘면서 최근 몇 년 사이 노조원, 서민들, 유색인종 등 전통적인 의미에서 사회적 약자로 인식되던 사회계층이 스스로를 ‘투자자계급’의 일원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한 사회조사 결과는 이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신의 지위, 소득과는 무관하게 ‘투자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집단을 가르는 중요한 잣대로 서서히 떠오르고 있는 셈이다. 실례로 지난 2002년 미국 상원의원 선거에서 스스로 ‘투자자계급’이라고 응답한 노조원 가운데 34%는 공화당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투자자계급에 속하지 않는다고 응답한 노조원 가운데 공화당에 표를 던진 비율이 27%인 것에 비하면 7% 포인트나 높은 수치다. 이 같은 사실은 부시 대통령의 개인계좌 도입 계획에 담긴 정치적 의도를 둘러싼 공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올 3월 로스 베이커 미국 럿거스대 교수는 한 기고문에서 “사회보장제도 개혁은 유권자들이 스스로를 투자자로 생각하게 함으로써 공화당 지지로 돌아서게 만들 것”이라 분석한 바 있다.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른 집단 정체성에 매몰되기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책임지는’ 개인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데 이 제도가 커다란 역할을 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정부(공적 영역) 역할을 강조하기보다는 개인의 책임을 우선시하는 보수적 가치체계와 한데 묶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연금제도 개혁에 대해 노년층이 반대하는 대신 젊은 층이 찬성 목소리를 높이는 사실은, 기존의 세대간 보수-진보 구도 역시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올 초 <월스트리트저널>이 “주식투자자가 많아진다는 건 곧 공화당 지지자가 많아진다는 걸 뜻한다”고 말한 것과도 분명히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아직껏 우리나라에서 사회계층과 투자자 의식을 한데 연결시킨 사회조사는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증권사 계좌를 통해 직접투자에 나선 사람에다 상장사 우리사주조합원을 포함하고, 여기에 다양한 간접투자에 참여하는 투자자를 고려할 경우 그 수는 상시고용 임금근로자수를 훨씬 넘어서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지난 해 후반부터 몰아닥친 ‘적립식 펀드’ 열풍에서 알 수 있듯, ‘주식으로 저축하는 일’은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전통적인 의미의 사회계층 구분을 뛰어넘는 새로운 투자자계급의 유령이 우리 사회에도 배회하기 시작했음을 짐작케 해준다. 새로운 가능성 ‘투자자 운동’ 이처럼 연금제도의 근본적 수술을 통해 개인의 노후가 금융시장에 더욱 의존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사회구성원이 점점 더 ‘투자자’라는 단일한 정체성을 획득하게 되는 투자자 사회는 이미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와 있다. 이제라도 투자자 사회의 등장이 가져올 여러 파장에 눈매를 새롭게 치켜뜨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이와 관련해 ‘투자자운동’이라는 새로운 공간의 가능성을 가늠해 보는 일은 나름대로 의미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간 계층, 지역, 성, 인종 등에 따라 사회구성원을 편가르기 하는 현실이 노동운동, 여성운동, 지역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을 낳는 밑거름이 되었다면, 이제 투자자 역시 하나의 주체로 나설 공간은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주자본주의라는 기치를 들고 경영자에 맞서는 주주들의 움직임은 곳곳에서 흔히 발견된다. 자본주의 오랜 역사에서 노동운동이 노동자계급의 배타적 이해만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섬으로써 보편적 사회운동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듯, 단지 투자기업의 단기적 재무성과에만 휘둘리지 않고 기업과 사회를 큰 틀에서 변화시키려는 투자자운동이 더없이 중요한 건 물론이다.
최우성〈이코노미21〉편집장 morgen@economy21.co.kr
개인의 노후가 금융시장에 내맡겨지는 일은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이제 결코 낯선 일이 아니다. 이미 자본시장의 공룡으로 탈바꿈한 국민연금 등 각종 연기금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대부분사람들의 경제적 운명은 (의식하건 못하건 간에) 금융시장과 한데 맞물려 돌아간다. 여기에 더해 올 연말부터 도입될 퇴직연금은 이제 우리에게도 이른바 ‘투자자 사회’의 지평이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탄이 될 게 분명하다. 기업복지부담을 줄이려는 사용자쪽의 요구와 자본시장 기반을 확충하려는 정부의 필요가 맞아 떨어져 탄생한 퇴직연금제도는 ‘연금(복지)의 금융화’를 더욱 재촉할 것이다. 보험개발원이 추정한 바에 따르면, 국내 퇴직연금시장 규모는 올해 45조원에서 출발해 2010년께는 67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평균근속연수가 6년도 채 안 되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직장 이동이 빈번한 사람들에게 연금적립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통산장치(개인퇴직저축계좌)가 마련된 것도 퇴직연금시장을 더욱 활성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금융시장의 기대대로 매달 일정액을 납입하는 확정기여형(DC) 방식이 퇴직연금제도의 대세로 자리 잡을 경우, 개인의 노후가 금융시장에 의존하는 정도는 더욱 심해질 게 불 보듯 뻔하다. 이처럼 연금제도 수술이라는 외피를 뒤집어 쓴 채 각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커다란 흐름의 본질을 이해하는 실마리는 바로 다양한 계층의 사회구성원을 ‘투자자’로 단일화시키는 메커니즘에 있다. 계층과, 성, 인종과 지역 등 그간 한 사회 구성원의 존재 기반과 의식구조를 갈라놓았던 기준들은 어느덧 사라지고, 이제 ‘투자자’라는 공통된 이해에 따른 편가르기가 그 자리를 새롭게 꿰차는 것이다. 바야흐로 투자자 사회의 탄생이다. 다양한 계층이 한 덩어리로 투자자 사회의 출현에 담긴 의미를 차분히 짚어봐야 하는 이유는 단지 ‘휘발성 강한’ 금융시장의 행보가 개인의 운명을 더욱 옥죌 것이라는 데 그치는 게 아니다. 산업사회 이래 오랜 기간 뿌리내린 사회정치적 권력 지형 자체를 변화시키는 촉매제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기업연금(401k)을 통한 간접투자가 크게 늘면서 최근 몇 년 사이 노조원, 서민들, 유색인종 등 전통적인 의미에서 사회적 약자로 인식되던 사회계층이 스스로를 ‘투자자계급’의 일원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한 사회조사 결과는 이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신의 지위, 소득과는 무관하게 ‘투자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집단을 가르는 중요한 잣대로 서서히 떠오르고 있는 셈이다. 실례로 지난 2002년 미국 상원의원 선거에서 스스로 ‘투자자계급’이라고 응답한 노조원 가운데 34%는 공화당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투자자계급에 속하지 않는다고 응답한 노조원 가운데 공화당에 표를 던진 비율이 27%인 것에 비하면 7% 포인트나 높은 수치다. 이 같은 사실은 부시 대통령의 개인계좌 도입 계획에 담긴 정치적 의도를 둘러싼 공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올 3월 로스 베이커 미국 럿거스대 교수는 한 기고문에서 “사회보장제도 개혁은 유권자들이 스스로를 투자자로 생각하게 함으로써 공화당 지지로 돌아서게 만들 것”이라 분석한 바 있다.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른 집단 정체성에 매몰되기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책임지는’ 개인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데 이 제도가 커다란 역할을 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정부(공적 영역) 역할을 강조하기보다는 개인의 책임을 우선시하는 보수적 가치체계와 한데 묶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연금제도 개혁에 대해 노년층이 반대하는 대신 젊은 층이 찬성 목소리를 높이는 사실은, 기존의 세대간 보수-진보 구도 역시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올 초 <월스트리트저널>이 “주식투자자가 많아진다는 건 곧 공화당 지지자가 많아진다는 걸 뜻한다”고 말한 것과도 분명히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아직껏 우리나라에서 사회계층과 투자자 의식을 한데 연결시킨 사회조사는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증권사 계좌를 통해 직접투자에 나선 사람에다 상장사 우리사주조합원을 포함하고, 여기에 다양한 간접투자에 참여하는 투자자를 고려할 경우 그 수는 상시고용 임금근로자수를 훨씬 넘어서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지난 해 후반부터 몰아닥친 ‘적립식 펀드’ 열풍에서 알 수 있듯, ‘주식으로 저축하는 일’은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전통적인 의미의 사회계층 구분을 뛰어넘는 새로운 투자자계급의 유령이 우리 사회에도 배회하기 시작했음을 짐작케 해준다. 새로운 가능성 ‘투자자 운동’ 이처럼 연금제도의 근본적 수술을 통해 개인의 노후가 금융시장에 더욱 의존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사회구성원이 점점 더 ‘투자자’라는 단일한 정체성을 획득하게 되는 투자자 사회는 이미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와 있다. 이제라도 투자자 사회의 등장이 가져올 여러 파장에 눈매를 새롭게 치켜뜨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이와 관련해 ‘투자자운동’이라는 새로운 공간의 가능성을 가늠해 보는 일은 나름대로 의미 있을 것으로 보인다.
최우성 <이코노미21>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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