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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새계를 지배하는 자, 보존하는 자

등록 2005-10-27 18:35수정 2005-10-28 14:27

허수경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허수경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허수경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고고학을 공부하며 독일에 머물고 있는 시인 허수경(41)씨를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났다. 마침 네 번째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문학과지성사)이 나왔길래 들고 가서 서명을 받았다. 날짜를 쓸 때 ‘1’자의 앞 삐침을 서양 식으로 길게 내린 것이 인상적이었다.

토속적 한의 정서에 역사성을 가미한 놀라운 첫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1988)의 세계는 그 뒤 자신의 학문 분야인 고고학적 사유와 국제적 시야를 가미하면서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그럼에도 이번 시집의 제1부에 묶인 ‘진주 말로 혹은 내 말로’ 연작들은 첫 시집으로의 회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발전적 계승이라 이를 만한 면모를 보여준다.

“꽃 든 자리/꽃 나간 자리//아득한/어두운//여보세요/불 좀 꺼주세요//환해서/잠 안 오네요”(<언덕 잠(봄)>)

“꽃 든 고시/꽃 나간 고시//아드커데/검등하데//저, 녘에 선 손님예/불 좀 꺼주이소예//훤등코해/멧잠 안 오네예”(<언덕 잠(봄) - 진주 말로 혹은 내 말로>)

1부의 연작들은 한 번은 표준말로 또 한 번은 시인의 고향인 진주 말 혹은 시인 자신의 말투로 같은 노래를 변주한 작품들이다. 동일한 내용이 어휘와 어투의 차이에 따라 완연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 흥미롭다. 특히 사투리 버전인 두 번째 작품에서 “아드커데” “손님예/불 좀 꺼주이소예” 같은 말투는 첫 시집의 화자였던 ‘늙은 주모’를 다시 만나는 것 같아 반갑기 짝이 없다.

시집에는 모두 다섯 쌍의 ‘…내 말로’ 연작이 실렸다. 시인은 “한동안 잊고 있었던 고향 말이 생각나 시도해 보았는데 앞으로 더 해 볼 생각”이라며 “쓰는 순서는 표준말이 먼저일 때도 있고 진주 말 쪽이 먼저일 때도 있다”고 귀띔했다.


한편 시인 자신은 이 시집을 가리켜 ‘반(反)전쟁시’라 했는데, 그것은 그의 전공인 고고학적 사유와 ‘미 제국’이 지배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진다.

“남자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 무덤을 찾아다녔다, 고 말한다. 무덤을 찾아내면, 찻빛 같은 황금릉을 찾아내면, 죽은 왕을 찾아내면…, 그때 왜 나의 아내가 사라졌는지, 그때 왜 나의 집에 불을 놓았는지, 그때 왜 나의 아이들을 말들이 짓밟았는지…, 오래 전에 어떤 왕이 죽었다,”(<오래 전에 어떤 왕이 죽었다,>)

“마치 도륙이 시작되던 어느 도시의/새벽녘처럼 그렇게/삼엄하게 해가 떠오르던 날//(…)//평안하게 태어나는 아가야/울지 말고 울지 말고//영변과 어미 누이/갈잎에 지던 물소리 제 살을 여는//빛을 들으라/이마를 간지럽히는 바람을 먹어라”(<영변, 갈잎>)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은 제목부터가 두 세계의 공존 또는 만남을 표방한다. 세계를 지배하며 파괴하는 것은 청동의 시간이지만 세계를 근저에서 지탱하며 보존하는 것은 감자의 시간이라는 것. 허수경씨의 시는 청동 아래 묻힌 감자를 캐내려는 고고학적 농사, 혹은 농민의 고고학을 지향한다.

프랑크푸르트/글·사진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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