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실직한 뒤 귀농하려고
노모 입원해있는 성주에 땅 장만
정부 ‘성산포대 사드배치’ 발표
“시로 반대하자” 3편 직접 낭송
“성주 항쟁 변화 따라가기 벅차
전자파 말한 첫 시가 이젠 낡아”
노모 입원해있는 성주에 땅 장만
정부 ‘성산포대 사드배치’ 발표
“시로 반대하자” 3편 직접 낭송
“성주 항쟁 변화 따라가기 벅차
전자파 말한 첫 시가 이젠 낡아”
‘사드반대 시’로 주목 김수상 시인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에는 시는 변혁에 복무해야 한다고 믿었다. 중년이 되어서 젊었을 때 쓴 시가 부끄러웠다. “리얼리즘(현실참여) 흉내만 낸 얼치기 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를 다시 써 47살에 등단했다. 49살이 되던 지난해엔 첫 시집 <사랑의 뼈들>을 냈다.
김수상(50) 시인 얘기다. 그는 요즘 ‘사드 반대 시인’으로 불린다. 이시영 시인은 그의 시가 우리 시대 리얼리즘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고 치켜세웠다. 쉰살이 되어 진짜 참여시인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 김 시인을 지난 20일 대구 범어시장 근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시인은 우연이라고 했다. “지난해 초 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았어요. 재취업이 힘들어 귀농하려고 성주군 성산리에 농지와 택지 800평을 샀어요. 왕대추나무도 심었죠.” 지난 7월13일 정부는 성산리 성산포대에 사드를 배치하겠다고 발표했다. 그가 산 땅은 포대 바로 밑에 있었다. 분노가 치밀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했어요. 시를 쓰겠다고 맘먹었죠.” 첫 사드 반대 시 ‘너희는 레이더 앞에서 참외나 깎아라, 우리는 싸울 테니’는 사드 레이더 앞에서 참외를 깎아 먹겠다던 여당 의원의 발언에 분노한 시다. 지역 온라인 매체인 <뉴스민>에 기고하고 촛불문화제에서 직접 낭송했다. 시인은 정부의 일방적인 배치 결정을 두고 “너는 기승전이 없이 왔다./ 이야기가 없이 왔다./ 무작정 왔다./ 결론으로만 왔다/. 통보로만 왔다”고 탄식했다. “우리의 노동을 거칠게 대했다./ 우리의 정갈한 밥상을 발로 차 엎었다”고 참외 농사를 걱정하는 농민의 울분을 대변했다.
지난 14일 발표한 시 ‘저 아가리에 평화를!’은 시위에 나선 여성을 비하한 군수의 망언에 대응한 것이다. 시인은 우리 모두 술집 하고 다방 하는 것들이라면서, “술집 하고 다방 하는 것들은/ 촛불을 들고 사드를 반대하면 안 되는 것이냐” “술병도 울고 찻잔도 분노에 떠는데/ 성주의 술집이여, 촛불을 높이 들자!/ 성주의 다방이여, 촛불을 사수하자”고 외쳤다.
시인은 촛불문화제에서 자신이 쓴 4편 가운데 3편을 직접 낭송했다. “제가 자발적으로 2천명 앞에서 낭송했어요.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죠. 성주에서 받은 문학적 에너지가 저를 이끌고 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이전에) 저는 (이런 시를 쓸) 문학적 깜냥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죠.”
시인은 지난해 낸 첫 시집 서문에서 “(내 시는) 모두가 몸 근방 50미터 안의 이야기들”이라고 토로했다. “세월호 시를 한편 쓴 적은 있었지만, 저는 외부보다는 내면에 더 관심이 있었죠. 연대에도 소극적이었어요.” 그러니 지금의 변화가 그에게 놀랍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 성주에서 일어나는 일은 따라가기 벅찰 정도입니다. 제가 처음 쓴 사드 반대 시가 지금은 낡아 버렸어요.” 첫 시에선 사드 배치로 전자파가 오면 참외 농사가 힘들어질 것이라는 얘기를 했다. “한달 새 구호가 달라졌죠. 지금은 평화 문제와 반전반핵을 이야기하죠. 촛불은 거대한 학습장입니다. 집회 참석 할머니가 국회의원이 잘못 말한 국방비 총액을 고쳐주기도 하죠.”
자신의 시가 호응을 얻은 이유를 묻는 말에 그는 “저 자신의 이야기라 절실했던 모양입니다. 낭송을 염두에 두고 말맛을 최대한 살려 쓴 것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했다.
경북 의성이 고향인 시인은 고향 땅을 팔고 귀농지로 성주를 선택했다. “치매 증세가 있는 노모가 성주의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어요. 의성보다는 성주에서 여생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 같아 땅을 샀죠. 매입 뒤엔 성주군 농업기술센터에서 6개월 귀농 교육을 받기도 했어요.” 그는 성주문학회 회원이기도 하다. “땅을 산 뒤 200m 인근에 고형폐기물 공장이 들어선다고 해서 주민들과 열심히 싸워 한숨 돌리는가 했는데 바로 사드가 왔죠. 허허.”
시인은 2002년 이혼 뒤 홀로 두 아이를 키우면서 살아왔다. 큰딸은 대학을 다니고 막내아들은 중학생이다. 실직 뒤엔 관공서 등의 ‘하청 글쓰기’로 생활하고 있다. “하청 글쓰기를 하다 머리가 아파 잠시 쉬는 틈에 (사드 반대 시를) 씁니다. 시 쓰는 데는 20~30분밖에 걸리지 않아요. 안에 뭔가 있었던 것처럼 시가 나옵니다.”
영남대 경제학과 84학번인 시인은 대학 때 ‘문화운동’에 뛰어들었다. 재학시절 대구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 문학분과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파업 공장을 찾아다니며 담벼락에 벽시를 걸었죠. 일종의 문화선동대였어요.”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운동’을 내려놓은 뒤 학원 경영, 결혼정보회사 관리직, 여성교양지 기자 등으로 살았다.
그러다 2005년 시와 다시 만났다. “이혼 뒤 우울증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죽기 전에 시 공부를 하자’고 결심했죠.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에 등록해 이성복 시인의 강의를 들었어요.” 그는 이 시인의 강의를 노트 3권에 옮겼다. 지난해 이 시인이 펴낸 시론집 중 하나인 <불화하는 말들>은 이 노트를 토대로 한 것이다. 그는 이 시인이 제자 20여명과 격주에 한번 하는 공부 모임(본유)에도 참여하고 있다. 지금은 불교 경전을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시인은 언어를 부리는 사람이며 칼끝을 시인 자신에게 겨누는, 그래서 시인이 망가지는 글이 좋은 시라는 이 시인의 시론에 공감해요.” 김 시인은 자신의 사드 반대 시를 두고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융합’이라는 평이 나온다며 “저의 당면 문제인 사드 문제가 해결되면 문학다운 시를 쓸 것”이라고 말했다.
대구/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김수상 시인.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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