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묘지 폴 발레리
비둘기들 노니는 저 고요한 지붕은
철썩인다. 소나무들 사이에서, 무덤들 사이에서.
공정한 정오는 여기에서 불길로 바다를 짠다.
언제나 되살아나는 바다를!
신들의 정적에 오랜 시선을 보냄은
오 사유 다음에 찾아드는 보상이여! (…)
땅 밑에 누워 있는 조상들이여, 주인 없는 머리들이여,
삽으로 퍼 올린 한 많은 흙의 무게에 짓눌려
우리네 발걸음을 휘청거리게 하는구나,
참으로 갉아먹는 자, 부인할 길 없는 구더기는
묘지의 석판 아래 잠자는 당신들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구더기들은 생명을 먹고 살며, 나를 떠나지 않는다.
자기에 대한 사랑일까. 아니면 미움일까?
구더기의 감춰진 이빨은 나에게 바짝 가까워서
그 무슨 이름이라도 어울릴 수 있으리!
무슨 상관이랴! 구더기는 보고 원하고 꿈꾸고 만진다!
내 육체가 그의 무덤에 들어, 나는 침상까지에서
이 생물에 소속되어 살아간다! (…)
날아갈, 온통 눈부신 책자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버려라
돛단배들이 먹이를 찾아다니는 이 잠잠한 지붕을!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를 기억하고, 잊혀진 그 시구들을 다시 뒤져보게 됐던 건 순전히 애니메이션 한 편 때문이다. 그것도 재패니메이션. 일본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이 분다>는 그의 전작(全作) 가운데서 가장 이질적이고 논쟁적인(이 작품은 군국주의를 옹호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영화였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는 가장 끌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야오의 다른 전작(前作)들에서는 비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매력적인 캐릭터가 나오는데(예컨대 <이웃집 토토로>에 나오는 숲의 정령 ‘토토로’나 <벼랑 위의 포뇨>에 나오는 바다의 요정 ‘포뇨’ 같은) 이 작품에서는 그런 존재들이 전혀 없다는 점이야말로 역설적으로 <바람이 분다>에 끌리게 된 요인이었다. 뭐랄까. 이건 진짜 얘기 같아서랄까. 영화는 말 그대로 ‘인간의 서사’만으로 채워져 있는데 그건 어쩌면 미야자키 하야오 스스로를 자전(自傳)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고, 하야오가 이 작품을 끝으로 거의 은둔의 길로 들어선 것 역시 그 같은 짐작을 가능케 한 대목이기도 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늘 ‘바람’이라는 것이 불기 마련인데 그 바람 앞에 섰을 때 ‘살아가야겠다’고 스스로에게 속삭이는 것은 단순한 의지의 발현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약간의 처절함이 담겨 있는 것인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더 나아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서 ‘살아내야만 한다’는 결기 같은 게 숨겨져 있다. 이 비루한 세상에서 더 이상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나 혼자만이 존재할 때의 얘기다. 사랑하는 연인 혹은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거칠고 험한 세상을 어떻게든 뚫고 나가야 한다. 근데 그건 동시에 굉장히 고독한 일이기도 하다. 사람은 외로움을 겪을 때 성장하는 법이다. 바람을 홀로 맞을 때, 그것을 견딜 수 있을 때, 바야흐로 나 자신과 주변을, 무엇보다 세상을 바꿀 용기를 얻는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의 주인공 ‘지로’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병으로 죽어가는 아내 ‘나호코’를 위해 최고의 비행기=전투기를 만들려고 온 힘을 다한다. 지로는 비행기 설계사이자 디자이너이고 자신이 만드는 전투기가 군국주의의 병기(兵器)로 쓰인다는 것과는 별개로 극단적으로 혼돈스러운 시대에 ‘죽어가는 아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자신의 일을 완성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어쩌면 순수한 것은 순수한 것으로 보답하겠다는 심성 같은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이 그 미묘한 애틋함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어서 대다수의 타인들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감정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도 지로의 여자 나호코만이 남자의 ‘그 마음’, 그 순수의 결정체를 이해한다. 그녀가 죽기 직전 스스로 이불을 걷고 거리로 나가 홀로 사라지는 건 더 이상 남자가 자신 때문에 상처를 받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 너의 공포를 저지하는 것은 나뿐/ 나의 뉘우침도, 나의 의혹도, 나의 속박도/ 모두가 네 거대한 금강석의 결함이어라/ 하나 대리석으로 무겁게 짓눌린 사자들의 밤에/ 나무뿌리에 감긴 몽롱한 사람들은/ 이미 서서히 네 편이 되어 버렸다. (…) 바람이 분다, 살아가야겠다/ 거대한 대기는 내 책을 펼쳤다 또 다시 닫는다/ 가루가 된 파도는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
나이 오십이 넘으면 다행스럽게도 서서히 깨달음이 온다. 죽지 말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인생은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타인을 위해 바쳐져야 한다는 것을. 그럴 때만이 나 자신의 존엄성이 지켜진다는 것을. 요즘은 바람 정도가 아니라 아예 광풍이 분다. 그 어느 때보다 내 아이가 위험하며 내 여자가 위험하다. 더욱더 굳건하게 ‘살아내야’ 할 때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