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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시장 바닥을 기어다니는 눈빛

등록 2016-10-07 19:06수정 2016-10-08 00:06

[토요판] 김중혁의 시
신림동 바닥에서  황지우

내 失業의 대낮에 시장 바닥을 어슬렁거리면,
그러나 아직, 나는 아직, 바닥에 이르려면 아직, 멀었구나.
까마득하게 멀었구나.
나는 탄식한다.
아, 솔직히 말하겠다 까마득하게 멀리 보인다.
까마득하게 멀리 있는 것이 보인다 내 발 바로 아래에 놓인,
비닐 보자기 위에 널퍼덕하게 깔아놓은,
저 냉이, 씀바귀, 쑥, 돌갓, 느릅나무 따위들이여,
그리고 그 옆의, 마찬가지로 널퍼덕하게 깔아놓은,
저 멸치, 미역, 파래, 청강, 김가루, 노가리 등이여.
그리고 또 그 옆의, 마찬가지로 널퍼덕하게 깔아놓고 앉아서,
스테인레스 칼로 홍합을 까고 있는,
혹은 바지락 하나하나를 까고 있는,
혹은 감자 껍질을 벗겨 물속에 넣고 있는,
바로 내 발 아래에 있는, 짓뭉개져 있는,
저 머나먼, 추운 바닥이여,
나의 어머님이시여.

어떤 시를 골라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황지우 시인의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앞뒤로 뒤적거리면서 한편 한편 읽어보았다. 전부 아는 시다.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고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나는 이 시집과 함께였다. 시가 뭔지 잘 모를 때였다. 어떤 게 시고 어떤 게 시가 아닌지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 실린 시를 한편 한편 읽어나가면서, ‘아, 이런 것도 시구나’ ‘이런 것도, 또 이런 것도’ 시라는 걸 알게 됐다. 시가 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신문 기사도, 광고도, 벽보도, 드라마의 내용을 요약한 글도 시가 될 수 있었다. 시에는 괄호가 들어갈 수도 있고, 물음표를 닮은 낚싯바늘도 들어갈 수 있었다. 시집 중에서 좀더 난해하고 실험적인 시를 좋아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언제나 가장 좋아하는 시는 ‘신림동 바닥에서’다.

시집의 다른 시에 비해 ‘신림동 바닥에서’는 조촐하다. 장식이나 장치가 없고, 감상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정적이다. 고등학생인 내가 봐도 어려울 게 없었다. ‘실업의 대낮’이라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고- 그로부터 몇 년 후, 나는 실업의 대낮을 정확히 알게 된다- 경상북도 김천에 살고 있는 내게 신림동 바닥이 어디에 붙어 있는 바닥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시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시의 마지막 두 줄을 읽으면서 어렴풋하게 ‘어머니께 잘하자’는 마음을 먹었던 것도 같다. 그때 나의 어머니 역시 차가운 바닥에 있었으니까, 짓뭉개져 있었으니까 그런 마음을 먹는 게 당연했을 것이다.

집으로 가는 길에 시장이 있었다. 좌판의 풍경을 잘 알고 있다. 좌판을 벌인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이 양쪽에 줄지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좌판에는 여자들뿐이다. 남자들은 모두 어디 간 것일까. 나는 여자들이 자신이 내놓은 물건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등교했고 하교했다. 어째서 바닥에다 판을 벌여야만 하는지 그때는 잘 알지 못했다. 우리집 역시 가난했지만 가난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봄이면 온갖 산나물들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고, 먹어보지 못한 생선과 해산물의 이름도 알게 됐다. 여자들 사이를 지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좌판 사이를 지나갔지만 낯선 이름을 듣고 새로운 향기를 맡는 일은 즐겁기도 했다. 시장은 내게 이름과 향기의 골목이었다. 가끔 고개를 들어 아주 먹음직스러워 보이던 과일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김중혁 소설가
김중혁 소설가
‘신림동 바닥에서’는 시선에 관한 시다. 시장을 어슬렁거리다 바닥을 내려다보던 시인의 눈빛은 땅으로 떨어진다. 수직으로 떨어진 눈빛은 수평으로 이어진다. 카메라가 팬(pan: 카메라를 고정시킨 채 좌우로 움직이며 촬영하는 기법) 하듯 시인의 눈빛이 시장 바닥에 깔려 있는 물건을 훑고 지나간다. 냉이와 씀바귀를 지나 홍합과 바지락과 감자에 이를 때까지 시인은 시장 바닥을 기어다닌다. 기어다니지 않고는 좌판에 깔아놓은 식재료를 저리도 자세하게 읊을 수 없다. 시장 바닥을 그렇게 기어다니던 시인은 추운 바닥의 어머니와 눈이 딱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신림동 바닥에서’를 읽을 때마다 문학을 하는 사람의 시선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나 역시 바닥에 이르려면 아직 까마득하게 멀었다. 그래도 계속 그곳을 바라보고 있다.

김중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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