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역사학대회는 전공단체들이 대거 참여해 역사학계의 당면 현안이나 화두를 탐구하고 토론하는 사학계 최대 규모의 학술 잔치다. 사진은 ‘역사학과 역사교육의 소통’을 주제로 지난해 서울대에서 열린 제58회 전국역사학대회.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또다시, ‘기록’을 놓고 논란이 한창이다.
2013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파동에 이어 “모든 것은 기록을 바탕으로 썼다”는 전직 외교부 장관의 회고록 일부 내용을 놓고 정치권이 격심한 정쟁 속으로 빠져든 시점에, 기록과 역사의 관계를 다루는 대규모 학술대회가 열린다.
오는 28~29일 열리는 제59회 전국역사학대회의 주제는 ‘기록의 생성과 역사의 구성.’ 기록은 역사 연구의 원천이며 역사 서술의 재료(사료)다. 기록이 없다면 역사도 없다. 방대한 <조선왕조실록>도 그보다 더 방대한 사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기록만으로 역사가 쓰여지는 것은 아니다. 지나간 과거를 모두 담은, 과거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기록이란 건 없다. 게다가 기록은 누가 어떤 의도로 작성했느냐에 따라 내용과 관점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기록을 보는 눈, 즉 기록관은 시대와 학자에 따라 계속해서 재해석되고 재규정돼왔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기록은 어떤 것이며, 기록은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가.
안병우 한신대 교수(한국사)는 대회 주최 쪽에 미리 제출한 기조 발제문 ‘기록관리와 역사연구의 최신 동향’에서 그런 물음에 답하고 있다. 그는 한국중세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이면서 국가기록관리위원회 초대 위원장과 한국기록학회 회장을 지낸 기록학자이기도 하다.
안 교수는 랑케(1795~1886)에서 발원한 근대 역사학이 붕괴된 뒤 포스트모더니즘의 공격과 비판 속에서 기록관과 기록의 범주가 큰 변화를 겪었다고 했다. 요컨대 역사의 대중화 또는 민주화다. 근대 역사학을 떠받치던 국가와 민족이라는 두 개의 축, 객관적 사실은 실재하며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 따위 요소들은 부정되고 폐기되었다. 공기록도 객관성을 의심받게 됐다. “공공기록만 가지고 인간 생활상을 복원 또는 재구성할 수 없다는 인식, 하나의 사건에도 서로 다른 관점에서 생산된 기록이 남아야 그나마 객관적으로 사건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생각”은 민간기록(매뉴스크립트)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이어졌다. 평범한 사람들의 ‘기억’을 기록하는 구술 채록, 웹에서 온갖 형태로 생산돼 짧은 시간 유통되다 소멸의 단계로 넘어가는 디지털 기록의 수집과 보관이 기록의 새로운 분야로 주목받기에 이르렀다.
안 교수는, 기록의 범주가 확장되면서 이를 모으고 관리할 ‘아키비스트’(Archivist, 기록관리자)의 적극적인 역할이 새롭게 요구되고 있다고 밝혔다. 아키비스트들에겐 “권력에 의한 기억의 선별 조작과 망각을 배제하며,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기록으로 남기고, 다면적 기록의 수집을 통해 사건을 총체적으로 보존하려는 실천적 활동이 필요하다. (…) 아키비스트는 역사가와 협력해 보존기록의 선별 체계를 수립하고, 기록물의 물리적 관리와 지적 통제를 수행하여 이용자에게 제공해야 한다.” 그런 연유로 독일·미국 등에선 대개 역사가나 역사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아키비스트를 맡고, 역사가와 역할을 분담한다. “국가기록원장을 행정직 공무원이 교대로 맡는 우리 현상은 매우 예외적이다.”
안 교수는 아키비스트의 육성과 함께 공기록 보관에 치우친 현재의 공공 아카이브(archive)를 민간의 기록까지 아우르는 종합기록관의 형태로 바꾸는 작업이 같이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첫째 날엔 안 교수의 기조 발제에 이어, 일본·중국의 기록 관리 시스템에 견주어 여전히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우리 현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동아시아 기록관리 체제와 역사학’이 발표된다. 또 소농경영의 안정화와 조선의 재정 시스템을 들여다 본 ‘조선왕조의 호적과 재정 기록에 대한 재인식’, 아카이브와 근대 역사학의 전개를 다룬 ‘유럽의 기록관’, 구술사의 현실과 과제를 짚어본 ‘한국 현대사 연구에서 구술사 기록의 탄생과 역할, 과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고문서 연구 방법을 소개하는 ‘고문서 연구를 위한 데이터 기술모델’의 발표에 이어 종합토론이 예정돼 있다,
29일엔 △기록의 생성과 유통 그리고 굴절 △근대 한국학에서 역사 지식의 구성과 재구성 △기록 변형의 다양성과 그 현실적 효과들 △근현대 기록과 역사교육 △현재와 역사의 재구성 등 각 소주제별로 논문 발표와 토론이 이어진다. 이틀 모두 서울 태릉의 서울여대 50주년기념관에서 열리는 이번 역사학대회에선 안병우 교수의 기조 발제를 비롯해 20개 학회에서 모두 121편의 논문을 발표한다. 올해 역사학대회의 주관 단체는 역사학회(kha.re.kr)다.
강희철 기자
hck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