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소재·주제로 묶은 단편들
인간·세계에 대한 성숙한 시선
구효서 신작 <시계가 걸렸던 자리>
구효서(48)씨가 새 소설집 <시계가 걸렸던 자리>(창비)를 펴냈다. 표제작과 올해 이효석문학상 수상작인 <소금가마니>를 비롯해 단편 아홉이 묶였다.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자유자재로 소화하는 ‘전천후 작가’의 작품집인 만큼 수록작들의 경향과 색채는 제각각이다. 그런 가운데 표제작과 <소금가마니>에서 고향과 어머니로 대표되는 ‘시원(始源)의 자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작가의 움직임이 주목된다. 수구초심이라 했는데, 그도 이제 출발지점을 돌아볼 나이가 된 것인가.
표제작의 주인공 화자로 하여금 명절도 기일도 아닌 때에 고향 집을 찾게 만든 게 바로 죽음을 앞둔 여우의 심사와도 같은 것이었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마흔일곱 살 사내는 “생의 끝점은 시시각각 구체화되고 있는데 생의 시작점이 여전히 모호하다는”(9쪽) 생각에 등 떠밀려 고향 쪽으로 걸음을 놓게 된다. 무슨 말인가. 공문서에 적힌 생년월일이 사실과 다른데다 태어난 시각도 정확히 아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 때는 시계가 없었으니까. 결국 그는 “널 낳고 나니깐 아침햇살이 막 뒤꼍 창호지문 문턱에 떨어지고 있더라”(11쪽)는 어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양력 생일날 아침 고향집의 햇살 자리를 찾아 가게 된 것이다. 소설은 그로부터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간헐적으로 훑은 다음, 뒤늦게 도입된 시계가 시골 마을에 가져 온 변화의 양상들을 흥미롭게 서술한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생의 시작점을 확인하는 일은 임박한 죽음을 수긍하는 행위와 포개진다. “내 죽음은 탄생과 함께 시작된 것이었으므로 내 삶의 시작점은 곧 내 죽음의 시작점이었다”(27쪽)는 인식에 이른 그는 죽은 뒤의 자신이 먼지와 물과 불과 바람(地水火風)으로 변하며 영원을 사는 “죽음 뒤의 시간”을 미리 경험하기에 이른다.
<소금가마니>는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어머니의 젊은 시절로 올라간다. 어머니가 읽었다는 키에르케고르의 일어판 책 <공포와 전율>이 화자의 시간 여행을 이끈다. 학교에 다닌 적이 없는 어머니가 일어판 철학책을 읽었다는 사실도 놀랍거니와, 그 배후에 혼전의 어머니와 연인 관계였던 것으로 알려진, 그리고 아버지가 세상을 뜬 지 열 달 만에 태어난 화자 ‘나’의 생부로 의심되던 마을의 지식인 청년이 자리잡고 있으리라는 짐작은 화자와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소설은 키에르케고르의 책 중 어머니가 밑줄을 그은 구절들을 군데군데 삽입하며 그것이 어머니의 삶에서 어떤 의미와 맥락을 지니는 것인지를 추적해 들어간다. 제목에 쓰인 소금가마니란 표면적으로는 두부를 만들기 위해 집 안에 놓아 두었던 세 개의 소금가마니를 이르지만, 상징의 차원에서는 주인공인 어머니를 가리킨다. 간수를 얻기 위해 어둠과 습기를 한껏 빨아들였던 소금가마니처럼 어머니는 “평생, 자기를 증오하듯 어둠과 습기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식을 사랑으로 지켜온”(82쪽) 것이다.
표제작과 <소금가마니>는 말하자면 ‘인생파’ 소설이라 할 법하다. 경험과 지혜를 토대로 인간과 세계에 대해 성숙한 관점을 피력하는 유의 소설 말이다. 그런 점에서는 소설집 맨 뒤에 실린 <달빛 아래 외로이>도 같은 계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거듭되는 불행과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낙천적이며 긍정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 인물을 통해 독자들은 생의 고난과 극복, 불행과 초월의 관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문제는 이 인생파 소설들이 화해와 대긍정을 구가하느라 더럽지만 엄연한 현실의 갈등을 간과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워낙 능란한 작가인지라 한갓 기우에 불과할 것임을 짐작하며 덧붙여 둔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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