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지예씨의 그림소설 <사랑하거나 미치거나>
고흐 불행한 말년, 촌뜨기 로트레크의 슬픔
피카소의 일곱 여인과 모딜리아니의 한 여인
그림을 통해 풀어놓은 화가 열명의 이야기
그들의 열정, 사랑과 광기에서 비롯되었구나
권지예(45)씨의 신작 <사랑하거나 미치거나>(시공사)는 ‘그림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왔다. 그림으로 쓴 소설이라서가 아니라, 그림을 가지고 쓴 소설인 탓이다. 고흐, 로트레크, 피카소, 모딜리아니 등 화가 열 사람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쓴 이야기들이 연작 형식으로 묶였다. 작가 권씨의 글과 그 글이 다루고 있는 그림 도판이 함께 실려 있어 양쪽을 비교해 가며 보고 읽는 별미가 있다.
빈센트 반 고흐를 그린 <별이 된 남자>는 고흐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 <자화상> <빈센트의 침실> <까마귀가 있는 밀밭> <귀에 붕대를 감고 있는 자화상>과 동업자이자 친구였던 폴 고갱의 <해바라기를 그리고 있는 빈센트>를 곁들이며 고흐의 마지막 날들을 재구성한다. 동거하던 고갱과 다툰 뒤 자신의 귀를 잘라 창녀에게 선물한 1888년 성탄절 전야에서부터 복부에 권총을 쏘고 사흘 뒤 마침내 숨을 거둔 이듬해 7월까지가 시간 배경이다. 작가는 이 불행한 화가의 말년을 동정심을 가지고 기술하면서 고흐의 그림에 대한 나름의 인상과 평가도 곁들이는데, 가령 이러하다: “그의 그림들은 오만했다. 대지와 중력에 저항하는 듯했으며 그 격렬한 생명력으로 마치 태양을 향해 꿈틀꿈틀 승천하는 듯했다. 태양은 거대한 자석이었고 그의 그림 속의 모든 생명 있는 자연은 그 자력에 감응하여 생명의 춤을 추는 듯했다.”(13쪽)
글·그림을 비교해가며 읽는 재미
고흐를 독주 압생트의 세계에 입문시킨 난쟁이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의 그림에는 <촌뜨기! 정말 촌뜨기!>라는 제목의 글이 헌사됐다. 평생 물랭루즈의 환락가 풍경을 그렸던 로트레크의 그림 가운데서는 드물게 정적이고 점잖은 <세탁부>의 모델이 주인공이다. 순진한 촌뜨기의 눈에 비친 물랭루주의 화려한 외관과 그 이면에 감추어진 슬픔과 환멸을 통해 로트레크 그림의 양면성을 드러낸다.
작가 권씨의 ‘그림소설’들은 화가의 생애나 연애담 같은 뒷얘기를 적당히 그림과 결합시키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림의 맥락과 의미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그에 걸맞은 이야기의 내용과 형식을 고안해 낸 결과물들이라 할 수 있다.
난봉꾼이자 정력가였던 파블로 피카소를 다룬 <러버들의 수다>는 피카소가 사랑했던 일곱 여인이 한데 모여 피카소를 그리워하며 한편으로 그를 헐뜯는 수다로 이루어져 있다. 법적으로 혼인관계를 맺었던 두 여인, 피카소의 아이를 낳은 두 여인, 그리고 그 넷에 못지않게 피카소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노라 자부하는 세 여인이 한바탕 수다를 떠는 가운데 피카소의 화려했던 여성 편력, 그리고 그의 다채로운 화풍의 배경을 이루는 여인들의 영향력이 드러난다. 여성들은 서로가 자신이야말로 천재 피카소를 만들어 낸 영감의 원천이며, 자신들의 사랑이 가장 진정어린 것이었음을 역설하며 다투는데, 마지막에 그들이 한 목소리로 동의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러고 보니 피카소는 별거 아냐. 우리 모두가 만들어낸 거야. 그는 우리들이 없었으면 피카소가 아니었던 거야.”(80쪽)
피카소에게 최소한 일곱 명의 여자가 있었다면 폐결핵에 스러진 비운의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에게는 잔 에뷔테른이라는 한 사람의 여자가 있을 뿐이었다. 모딜리아니는 잔의 초상화만도 스물여섯 점을 그렸다. <천사의 푸른 눈>은 모딜리아니가 죽은 뒤 만삭의 몸으로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한 잔이 자살 직전 뱃속의 아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형식을 취한다. 파리 몽파르나스의 카페에서 술과 가난에 찌든 서른네 살 무명 화가와 열아홉 살 화가 지망생 처녀가 처음 만난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은 곧바로 동거에 들어가는 것인데, 그로부터 두 사람이 차례로 숨을 거둔 2년 반 남짓한 시간이 모딜리아니와 잔의 짧은 생애의 절정이었다. 잔의 입을 빌려 서술되는 모딜리아니 그림의 비밀은 그가 왜 요절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말해 주는 듯하다: “그들(=모딜리아니의 그림 속 인물들)의 가슴속엔 깊은 우물이 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거든. 그 슬픔의 심연 속에서도 잔잔한 기쁨이 동심원을 그리고, 생의 고단과 우수와 권태와 관조와 비애가 공기처럼 흐르고 있는 듯하거든. 길다랗고 가는 목에 처진 어깨, 살짝 외로 꼰 고개, 긴 얼굴… 얼마나 슬프고도 애틋한 모습이니.”(94~5쪽)
작가는 머리말에서 “모든 예술의 원천은 사랑과 광기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열정이 아닐까” 자문한다. 책의 제목은 바로 그런 생각을 함축하고 있거니와, 예술의 원천으로서의 사랑과 광기를 누구보다 극적으로 보여주는 이가 멕시코의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라 할 수 있다. 프리다 칼로는 어떤 의미에서 로댕의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카미유 클로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스물두 살 어린 나이에 스무 살 연상이었던 바람둥이 화가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한 것이 그의 길지 않은 생에 그늘을 드리우는 한편 강렬하면서도 독자적인 그림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작가 권씨는 <겨우 살짝 몇 번 찌른 칼자국>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우주와 지구, 그리고 나와 디에고, 솔로틀이 벌이는 사랑의 포옹> <디에고와 나> <작은 칼자국 몇 개> 같은 프리다 칼로의 그림들을 들어 가며 프리다의 고통스럽지만 씩씩한 삶을 재구성한다.
프리다의 고통스러우나 씩씩한 삶
책에는 이밖에도 미국의 현대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제목을 따 온 <오전 11시>, 관능의 화가 구스타브 클림트의 모델을 주인공 삼은 <유혹>, 마르크 샤갈의 아내 벨라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생일>, 고독하고 분열적인 내면을 독특한 자화상 연작을 통해 드러낸 에곤 실레의 삶을 그린 <거울 속의 나르시스트>, 에로틱하고 엽기적인 소녀상을 그린 발튀스의 그림 <기타교습>을 소재로 삼은 같은 제목의 글이 실렸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시공사 제공
모딜리아니 ‘노랑 스웨터의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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