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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광화문에서 밥 딜런이 부릅니다

등록 2016-11-25 19:30수정 2016-11-26 11:18

[토요판] 신형철의 격주시화(隔週詩話)
-변혁의 시대, 기성세대를 향한 명령
시대는 변하고 있다 (The times they are a-changin')   밥 딜런

사람들아 여기 모여라
그대가 어디를 떠돌고 있든.
인정하라 그대 주위의 물이 차올랐다는 것을.
그리고 받아들여라
곧 당신이 뼛속까지 젖게 될 것임을.
당신의 시간이 구해낼 가치가 있는 것이면
헤엄치기 시작하는 게 좋을 것이다
아니면 돌처럼 가라앉게 되리니.
시대는 변하고 있으므로.

작가와 비평가들이여 오라
펜으로 예언하는 그대들.
두 눈을 크게 뜨고 보라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테니.
성급히 입을 열지 마라
수레바퀴는 아직 돌고 있으므로.
누가 어떻게 명명될지는 말할 수 없지
오늘의 패자가 내일의 승자일 테니.
시대는 변하고 있으므로.

상하원 의원들이여 오라
부디 저 부름에 귀 기울여라.
입구를 막아서지 말고
홀을 봉쇄하지 마라.
다치는 사람은
시간을 끌어온 자가 될 테니.
바깥은 전쟁 중이고 그것은 들끓고 있다
곧 당신의 창문을 흔들고 벽을 덜컹이게 하리.
시대는 변하고 있으므로.

어머니 아버지들이여 오라
전국 각지에서.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무언가를 비난하지 마시라.
당신들의 아들딸들은
이미 여러분의 통제를 벗어나 있으니.
당신들의 오래된 길은 급격히 낡아가는 중
그러니 손 내밀지 않을 거라면 부디 새 길에서 비켜서 주시길.
시대는 변하고 있으므로.

선, 그것이 그어지고
저주, 그것이 내려진다.
지금 느린 자는
훗날 빠른 자이리.
지금 이 현재가
훗날 과거가 되듯이.
질서는 급격히 쇠락해가고
지금 맨 앞인 자가 훗날 맨 끝인 자가 되리라.
시대는 변하고 있으므로.

* The times they are a-changin’ (콜롬비아레코드, 1964)에 수록. 번역은 필자의 것.

11월12일 토요일 밤, 서울 광화문까지는 못 가고 광주 5·18광장에 나갔을 때, 무대에 올라와 자유발언을 한 이들 중 나를 가장 감동하게 만든 것은 중학생 아니면 고등학생이었다. 이렇게 엉터리인 나라에서 자식 키우느라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 나왔다는 말을 듣다가 나는 스스로도 의아할 정도로 울컥하고 말았다.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던 아내와 이야기하다 그 이유를 깨달았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자식’ 세대의 정체성으로 살던 내가 이제는 ‘부모’의 자리에서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을.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분노했을 법한 일에, 이제 학생들은 분노하고 나는 속으로 부끄러워하는 일이 잦아졌다. 나는 기성세대가 되었다.

기성세대는 부끄럽다. 그날 밤 10시가 넘은 시각에 영업 중이던 빵집에서 심야 알바 중인 제자를 우연히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다 멈칫 발길을 돌린 내 마음속에도 설명하기 힘든 어떤 부끄러움이 섞여 있었다. 그런데 그 부끄러움의 이면이 혹시 오만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십대들의 발언 영상을 보고 난 후였다. 기성세대의 부끄러움이란, 어쩌면, 이렇게 나쁜 세상을 만든 것이 우리니까 좋은 세상도 우리가 만들어볼게, 라는 기분일까. 혹시라도 그런 기분이라면 그것은 옳지 않다. 그날 무대에서 발언한 학생과 영상 속 십대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망친 사람들에게 누가 언제까지 기회를 준다던가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 만 18살이 아니라 만 19살부터 투표할 수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다. 만 18살부터 운전면허를 따고 여권을 발급받고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투표는 못 한다. 고등학생은 정치 의견이라는 것을 가질 수 없고 가져서도 안 된다는 것인가. 행여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자격을 갖출 수 있게 교육을 하면 될 일이다. 정치란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 대한 사유 그 자체인데 그런 사유란 빨리 시작할수록 좋을 것이다. 사회 모든 영역에 정년(停年) 제도가 있으나 투표권에는 정년이 없다. 노년세대의 투표권을 박탈하자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노년세대에게 보내는 그만한 신뢰를 이제는 아래 세대에게도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시기상조라는 말도 기성세대가 자주 하는 말이니까, 청소년 투표권에 대해서도 같은 말이 나올 법하다. 그러나 적절한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일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몰락은 단순히 한 정권 차원의 사건이 아니라 노년세대에게 오랫동안 존재해온 어떤 심리적 체제의 종언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일 수 있다. 그 체제는 박정희-육영수-박근혜를 둘러싼 가족 판타지, 그러니까 ‘국민을 위해 목숨 바친 국부/국모’의 비극적 죽음 이후 홀로 자란 ‘공주’에 대한 국민적 죄책감과 동정심에도 힘입은 것이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윗세대는 그 마음의 빚을 완전히 청산할 수 있었으리라. 공주에게는 최씨 성을 가진 또 다른 부모가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으므로.

현실 정치를 보는 혜안을 갖고 있지 않지만 지금이 중대한 역사적 변혁의 초입이라는 것 정도는 알겠다. 멀게는 1961년 이후, 짧게는 1979년 이후부터 이 나라에 뿌리 내린 어떤 심리적 체제가 무너짐으로써 비로소 이 사회의 어떤 뿌리들이 함께 뽑힐 소중한 기회를 얻었다는 것을 말이다. 이런 와중에 다른 시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 후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그의 노래도 듣고 가사도 살폈는데 그중 하나가 ‘시대가 변하고 있다’였다. 이것이 그의 가장 훌륭한 시는 아니겠으나 지금 우리에게 가장 어울리는 시라고는 할 수 있겠다.

밥 딜런은 60년대의 진보적 열기 속에서 그 물결이 돌이킬 수 없는 필연이라고 믿었고 1연은 그것을 선언한다. 1연의 청자는 특정돼 있지 않다. ‘어디를 떠돌고 있는 누구’에게나 이 변화는 공평하게 관철된다. 그것은 주위의 물이 차오르는 일과 같아서 살고 싶으면(“당신의 시간이 구해낼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당장 헤엄쳐야만 한다. “인정하라” 혹은 “받아들이라”와 같은 명령들에 스물셋 밥 딜런의 결기가 담겨 있음은 물론이다. 1연이 서론이라면 이어지는 2~4연은 본론이며 각 연에는 청자가 특정돼 있다. 작가와 비평가(2연), 국회의원들(3연), 그리고 전국의 모든 부모들(4연). 이들에게는 나름의 권력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딜런의 예리한 눈길도 그것을 향한다.

먼저, 작가와 비평가들에게는 펜이라는 권력이 있다. 딜런은 그들에게 두 눈을 크게 뜨고 현실을 지켜보되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고 말한다. 역사적 변혁의 역동성은 그들의 예측 능력을 뛰어넘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정치인들에게는 민의에 귀를 기울이되 행여 그것을 왜곡할 생각은 말라고 말한다. (3연에서 “입구를 막아선” 정치인의 이미지는 1963년 6월11일 앨라배마 주립대학에 최초로 입학을 시도한 흑인 학생의 등교를 직접 막아선 당시 앨라배마 주지사 조지 월리스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리고 이어 전국의 불특정 부모들에게는 예나 지금이나 자식 가진 이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지당한 충고를 던진다.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비난하지 마라.’

5연은 결론이다. “선, 그것이 그어지고/ 저주, 그것이 내려진다.”(the line it is drawn, the curse it is cast) 이 노래에서 거의 유일하게 섬뜩하고 또 모호한 것이 이 첫 두 행이다. 변화를 이끄는 이들과 이를 거스르는 이들 사이에 분할 선을 긋고 후자에 저주가 내려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변화의 당위성을 장엄하게 수식하고 싶었을 청년 시절의 수사학이라고 보면 이해가 되기도 하거니와, 지금 느린 자는 훗날 빠른 자가 되고 지금의 선두가 나중에 후미가 될 것이라는 요지의 구절은 공관복음 여기저기에 나오는 예수의 말을 인유(引喩)한 것이기도 하다. 이 노래를 부를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이 1978년에 종교적 계시를 경험하고 기독교인이 될 줄은 몰랐겠지만 말이다.

밥 딜런은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된 지 20년 만에 상을 받았다. 1996년 버지니아 군사대학교의 영어과 교수 고든 볼이 시인 앨런 긴즈버그의 제안을 받아 밥 딜런을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할 때 추천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됐다. “그의 언어와 음악은, 시와 음악 간의 핵심적이며 오랜 기간 존중되어온 관계가 회복되도록 도왔고, 세계 역사를 변화시킬 만큼 세계로 스며들었다.”(손광수, <음유시인 밥 딜런>, 25, 38쪽에서 재인용) 딜런이 지금도 공연에서 이 노래를 즐겨 부르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오늘만큼은 그가 광화문에서 이 노래를 부른다고 해도 아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곳에서도, 시대는 변하고 있으므로.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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