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간단하고 자명한 주장을 하기 위해 실로 먼 길을 돌아왔다. 내 나이 이제 80. 인생의 황혼녘에 서서 지난 40년을 되돌아보면 내가 살아온 삶은 반드시 의미없는 시간만은 아니었다.”
그 아주 간단하고 자명한 주장이란 이런 것이었다. “본인은 신문기자다. 본인은 상식을 주장하다가 감옥에 왔다.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그런데도 언론인으로서 자유언론을 주장하다가 황당하게도 감옥으로 왔다. 언론인이 자유언론을 주장하는 것은 누에가 뽕잎을 먹는 것처럼 당연하다. 누에가 뽕잎을 먹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언론인이 자유언론을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그것이 아니다. 잠자코 박수만 치라고 하니 그게 될 말이냐? 강포한 자의 목소리만 크고, 약한 자의 소리는 신음조차 안 들린다.”
1974~75년 살벌했던 박정희 유신독재체제 아래서 한국기자협회 동아일보사분회장으로 한국 현대사에 한 획을 그었던 ‘자유언론실천선언’과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장윤환(사진) 선생의 얘기다. 그 일로 끝내 113명의 동료들과 함께 일터에서 쫓겨난 그는 4년 뒤인 78년 10월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에서 발행한 <민주·인권일지>가 ‘긴급조치 9호’ 위반에 걸려 1년간 감옥살이도 했다. ‘아주 간단하고 자명한 주장’은 그 사건 항소심 법정에서 한 그의 최후진술 녹취록의 일부다.
희곡 쓰던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자유언론운동’ 이끌다 75년 해직
동아투위 결성해 복직투쟁 40여년
88년 ‘한겨레’ 첫 직선 편집위원장
‘방북취재’ 탄압으로 강제구인 고초도
치매 위기 이겨내고 팔순에 집필
1988년 8월3일 한국 언론사상 최초로 기자 직선으로 <한겨레> 2대 편집위원장에 당선된 장윤환. <한겨레> 자료사진
그가 최근 회고록 <글로 남은 한평생>(한겨레시니어 펴냄)을 냈다. “강제해직당한 이래 41년이 넘는 기나긴 세월 동안 ‘자유언론실천’과 민주화운동의 외길을 걸어온”(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 언론인의 삶이다. 88년 <한겨레> 창간에 참여해 첫 직선 편집위원장을 맡아 이듬해 ‘방북취재 사건’ 때 강제구인의 고초도 겪었고, 논설주간 등을 지낸 뒤 2003년 정년퇴임한 그는 회고록에서 “이제 여한은 없다”고 했다.
지난 23일 저녁, 서울 종로1가 식당 겸 복합문화협동조합 ‘문화공간 온’에서 선후배들이 조촐한 출간기념 자리를 마련했다. 경기도 용인 자택에서 1시간 반 넘게 전철 등을 3번이나 갈아타고 온 팔순의 그는 깔끔하고 건강해 보였다. 한동안 발음조차 분명치 않았던 모습을 기억하던 이들에게 그의 ‘변신’은 놀라웠다. “10년쯤 됐나. 그때 치매로 고생했지. 사흘간 병원에 입원까지 해서 엠아르아이(MRI·자기공명영상) 촬영도 하고 했는데, 약 먹고 나았어.” 심신 모두 ‘완치’라고 했다. “순전히 약주 때문이 아니었냐”(박우정 전 <한겨레> 편집위원장)는 짓궂은 농담에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989년 4월20일 한겨레신문사의 ‘방북취재계획’ 관련 안기부의 언론 탄압에 맞서 강제구인장을 받고 정태기(왼쪽) 개발본부장과 함께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사옥을 나서는 장윤환 편집위원장. <한겨레> 자료사진.
75년 3월17일 새벽, 언론자유를 요구하며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농성하다 정권과 회사가 동원한 폭도 200여명에 의해 길바닥으로 끌려나갔을 때 그의 나이 39살. 영화·연극·음악·무용 등 공연예술 분야를 담당하면서 무대에도 올려져 호평받은 세태풍자 희곡 <색시공>을 썼던, “절대 권위”(김효순 전 <한겨레> 대기자)의 문화부 기자 장윤환은 그렇게 쫓겨났다. “졸지에 실직자가 됐다. 첫째(딸)가 초등학교 3학년, 둘째(아들)가 초등학교 1학년, 셋째(딸)가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처음 몇 달은 동아투위 문제에 골몰해서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도 없었다. 3개월간은 후원금으로 그럭저럭 지낸 것 같다. 그러다가 동아일보사 앞 항의 도열 시위를 끝내면서 정신이 들었지만, 별 뾰족한 수는 없었다.” 영문 번역 등 이일 저일로 생계를 이어가던 그는 ‘한겨레신문’ 창간과 함께 다시 언론 일선에 복귀했다. “동아일보사에서 쫓겨난 지 13년 만의 일이었다. 나는 못다 한 자유언론의 열정을 불태웠다.”
그는 말했다. 박정희 유신독재가 끝장난 37년 뒤, 그 독재자의 딸 ‘박통’이 수백만 촛불 시민의 퇴진 요구를 받고 있는 상황에 대해 말했다. “지금은 그래도 권력이 국민에게 있지 않나. 그때는 박정희, 그 한 사람이 갖고 있었지.” 언론에 대해서도 그는 “지금 언론은 그때에 비하면 지나칠 정도로 자유를 누리지. 그래도 괜찮아. 언론이 늘 권력보다 (힘이) 더 세야 해”라고 말했다. “우리가 결국 이길 거야. 나는 낙관하고 있어.”
큰딸·외손자와 함께 살고 있다는 그는 “1주일에 한두번씩 한 시간 정도 집 주변 길을 걷고” 주로 책을 읽으며 지낸다고 했다. “세계명작들인데, 얼마 전엔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읽었어.”
2016년 11월23일 서울 종로1가 문화공간 온에서 한겨레신문사 사우회에서 마련한 회고록 출간 기념 모임에서 장윤환 선생과 선후배들이 막걸리로 건배를 하고 있다. 한겨레 온 제공
4부로 나뉜 회고록은 제1부 ‘동아일보와 나’, 제2부 ‘한겨레신문과 나’ 등 언론인 현역 시절 이야기를 담은 부분, 그리고 <색시공>과 은퇴 뒤 쓴 <여시아문>(나는 이렇게 들었다) 등 자작 희곡 2개로 구성돼 있다.
회고록 앞머리에 이런 글이 실려 있다. “나는 젊었던 시절부터 작가가 됐으면 하는 꿈이 있었다. 그러나 단편소설이면 모를까 장편소설을 쓰기 위해선 끈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색시공’은 중앙대 김정옥 교수가 연출한 무대에 올라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 뒤에도 작품을 쓰고 싶은 욕구는 있었지만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된 뒤 영어 번역으로 먹고사느라 쓰지 못했다. <여시아문>은 퇴직 뒤 쓴 작품으로, 아직 무대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작품이 책으로 나왔으니 몇몇 극단과 접촉해볼 생각이다.”
시절이 좋았다면 극작가로도 대성할 수 있었을, “온화한 성품으로 예술과 술을 사랑하시던 장 선배”(김종철)의 꿈이 말년에나마 이뤄지기를 빌며, 자리를 함께한 선후배들은 다함께 막걸리 잔을 들었다.
글·사진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