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김해자, 나의 시를 말하다
어진내에 두고 온 나 김해자
지금도 청천동 콘크리트 건물 밖에는 플러그 뽑힌 채 장대비에 젖고 있는 도요타 미파 브라더 싱가 미싱들이 서 있죠 나오다 안 나오다 끝내 끊긴 황달 든 월급봉투들 무짠지와 미역냉국으로 빈 배 채우고 있어요 얼어붙은 시래기 걸려 있는 담 끼고 굽이도는 골목 끝, 아득하고 고운 옛날 어진내라 불리던 인천, 갈산동 그 쪽방에는 연탄보다 번개탄을 더 많이 사는 소녀가 살고 있네요 야근 마치고 돌아오면 늘 먼저 잠들어 있는 연탄불 활활 타오르기 전 곯아떨어지는 등 굽은 한뎃잠
배추밭에 배추나비 한가로이 노닐던 가정동 슬라브집 문간방에는 사흘 걸러 쥐어터지던 붉은 해당화가 울고 있어요 지금도 들리는 아이 울음소리 듣지 않으려 귀 막고 이불 속에 숨어 있다 저도 몰래 뛰쳐나가 패대기쳐진 여인과 아이와 한 덩어리 된 어린 여자 눈물방울이 아직도 흙바닥에 뒹굴고 있을까
교도소가 마주 보이던 학익동 모퉁이 키 낮은 집 흙벽 아궁이가 있던 옛 부엌엔 전단지 속 휘갈긴 어린 해고자 메모 ‘배가 고파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요’ 애호박 몇 조각 둥둥 떠다니는 밀가루 죽이 아직도 부글부글 끓고 있는 효성동 송현동 송림동 바람 몰아치던 주안 언덕배기 그 작고 낮은 닭장집 창문마다 한밤중이면 하나둘 새어 나오는 쓸쓸하고 낮고 따스한 불빛
이상하기도 하죠 스무 해 전에 도망쳐 왔는데
아직도 내가 거기에 있다니
내가 떠나온 그곳에 다른 내가 살고 있다니요
푸른 작업복에 떨어지는 핏방울
아직도 머리채 잡혀 끌려가고 있다니
앞으로 달려온 줄만 알았는데
제자리에 선 뜀박질이었다니요 시집 <집에 가자>(삶창·2015)에 수록
아직도 내가 거기에 있다니
내가 떠나온 그곳에 다른 내가 살고 있다니요
푸른 작업복에 떨어지는 핏방울
아직도 머리채 잡혀 끌려가고 있다니
앞으로 달려온 줄만 알았는데
제자리에 선 뜀박질이었다니요 시집 <집에 가자>(삶창·2015)에 수록
‘다름’이 지우지 못하는 ‘같음’ 지난 5월,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19살의 청년이 열차에 치인 시각은 오후 5시57분. 유품이 된 컵라면은 그가 그 시각까지 먹지 못한 점심이거나, 종일 바깥에서 일한 사람의 한 끼로는 턱없이 모자란 저녁이었을 것이다. 그의 월급은 144만6천원. 야근과 휴일근무 수당 등을 모두 합한 금액이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미성년 노동자의 죽음은 ‘비용 절감’의 살인적인 시스템이 예비해둔 완벽한 타살이었다. 배후에는 그렇게 절감된 돈을 가져가는 누군가가 있고, 청년의 죽음 후에도 바뀌지 않는 착취의 하청 구조가 있다. 이 사건이 불러일으킨 것은 분노와 슬픔만은 아니었다. 청년을 죽인 지하철이, 우리가 일하고 친구를 만나고 시장에 가기 위해 타고 다니는 그 지하철이라는 끔찍한 깨달음이었다. 지하철만이 아닌, 우리가 이용하는 모든 시설과 물품과 서비스에 노동자의 피로와 죽음이 배어 있다는 비통한 각성이었다. 김해자는 이 새삼스러운 각성이 감상적인 동일시가 되어서도, 각자의 경제적 처지에 대한 선명한 구별짓기가 되어서도 안 된다고 본다. 노동의 현실은 더 교활해졌지만 노동시는 쇠퇴한 지금, 20세기보다 더 황폐한 21세기에 묵묵히 노동시를 쓰면서 김해자는 다른 차원의 동일시와 구별짓기를 말한다. 스무 해 전에 도망쳐 나온 청천동 미싱 골목에, 효성동 송현동 등등의 작고 낮은 닭장집에, “아직도 내가 거기에 있다니/ 내가 떠나온 그곳에 다른 내가 살고 있다니요”. ‘다른 나’는 타자이면서 ‘나’다. 내가 떠나온 그곳에 살고 있는 ‘다른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르고, 20년 전의 ‘나’와 같다. 그런데 이 시차는 개인적인 것일 뿐 현실 전체의 것은 아니다. 현실 전체의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앞으로 달려온 줄만 알았”던, “제자리에 선 뜀박질”은 각자의 처지가 아무리 달라(졌어)도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공동의 현실’이다. 다름을 지운 같음이 아니라, 다름이 지우지 못하는 같음. 김해자는 이 ‘다른 같음’의 궁핍과 처절함을 쓴다.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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